출출한 오후, 간식을 사 먹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자. 특별히 꼭 먹고 싶은 것이 있어서 들어간 게 아니라면 무엇을 먹을지 고르고 결제하는 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너무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마다 선택 기준은 모두 조금씩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가격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것이고 다른 어떤 사람은 칼로리나 맛을 고려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아무리 맛있는 제품이더라도 특정 기업의 제품은 선택지에서 아예 제외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 필자가 고려하게 된 새로운 선택 기준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아마 채식주의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종교적 신념에 따른 혹은 다이어트를 위한 채식주의를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채식을 하는 이유에 종교나 건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채식을 하는 사람마다 어떤 동물성 식재료는 허용하고 어떤 것은 허용하지 않는지도 다 다르다. 필자는 종교나 건강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플렉시테리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플렉시테리언이란 주로 채식을 하지만 경우에 따라 고기와 생선도 먹는 사람을 뜻한다. 조금이라도 더 채식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필자의 개인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다들 어디선가 들어봤지만 외면하고 있는 “그 실태” 때문이다. 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동물성 식재료(우유, 달걀 등)와 제품들(동물의 털로 만든 옷, 동물실험을 거친 화장품과 약 등)의 생산과정은 방대한 양의 동물 학대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젖소에게 우유를 얻기 위해 인간은 젖소를 쉴 새 없이 강제 임신, 출산시키고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어미 소에게서 빼앗아 간다. 태어난 송아지를 위한 우유를 짜내서 인간을 위한 우유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제로 임신시키는 과정과 젖을 짜내는 과정은 더욱 잔인하니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겠다.

물론 학식과 외식이 식생활의 주를 이루는 학생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채식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노력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금 더 고민하면 대체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페라테를 마실 때 우유 대신 두유 옵션을 선택한다거나 닭 가슴살 샐러드 대신 두부 샐러드를 먹는 것 등이다. 아직 우리에게 채식이 어려운 이유는 채식을 위한 선택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조금만 견디고 지금 존재하는 채식 선택지를 찾아서 지속적으로 소비한다면 (경제 원리에 의해) 결국 그 선택지가 늘어나 어렵지 않게 채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어떤 기준에도 절대적인 옳고 그름은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각 선택이 스스로에게, 우리 사회에, 혹은 지구에 불러일으키는 영향이 다를 뿐이다. 그러한 영향력을 행할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한 선택과 책임은 본인의 몫이다. 간식 하나라고 생각하면 작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작은 소비를 하루에도 여러 번씩 매일매일 끊이지 않고 하고 있다. 식료품, 의류, 생활용품, 교통수단, 문화 콘텐츠 등 우리가 선택한 모든 것이 모여 변화를 일으킨다. 

아마 이 글을 읽었음에도 자신의 소비에 어떠한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억지로 바꿔놓기 위해 쓴 글은 아니다. 같은 소비더라도 모르고 하는 것과 알고 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에 글을 썼다. 또한, 이 글을 읽은 어떤 사람들은 당장 자신의 소비를 급격히 바꿀 생각은 없더라도 가끔은 이 새로운 선택 기준을 기억하고 적용해 주리라 믿는다. 새 학기는 새로운 마음을 먹기에 딱 좋은 시기 아니던가? 매일 비슷하던 일상에 새로운 영향력을 담아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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