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인연>

 

생명과학과 16

신치홍

 

유난히 무더웠던 작년 8월, 축구 대표팀에 선발된 나는 9월에 있을 교류전을 위해 학교에 남아 합숙 훈련을 하며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 치여 살고 있었다. 내 일정은 이러했다. 아침 9시 30분에 연구실에 출근하고, 저녁 6시 30분쯤 퇴근했다. 삼각김밥 두 개와 맥반석 달걀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는 쉬는 시간도 없이 얼른 옷을 갈아입고 7시 20분까지 운동장에 나가 개인훈련을 하며 훈련을 준비했다. 훈련은 8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됐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훈련이 끝나고 함께 축구 대표팀을 하는 형들과 술을 마시고 새벽 네 시가 다 되어서야 기숙사 방에 들어왔다. 짧은 쪽잠을 잔 후엔 금방 아침이 되어 연구실에 출근했다.

축구 훈련은 수요일과 토요일마다 쉬었고 연구실은 주말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진짜 휴일은 일주일에 단 하루, 바로 토요일이었다. 나는 이 황금 같은 토요일에도 쉬지 않았다. 난 매주 토요일마다 아버지와 낚시를 하러 갔다. 아버지와 낚시를 하러 가기 위해 금요일 밤 훈련이 끝나고는 서둘러 씻고 서울로 가는 11시 버스를 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새벽 2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다. 2시 30분쯤, 잠을 거의 잘 듯 말 듯 할 때쯤에 아버지가 나를 깨우셨고 새벽 4시에 출항하는 배를 타기 위해 서둘러 출발했다. 그렇게 나는 잠도 한숨 못 자고 새벽 4시에 배를 올라타서는 14시간 동안 서해 이곳 저곳을 쏘다니며 농어를 잡으러 다녔고, 14시간 후인 오후 6시쯤 육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더운 8월, 한 달 새 5킬로그램이나 빠진 내 체중이 그때의 내 일정을 요약해주었다.

나와 함께 축구 대표팀 훈련을 하던 내 룸메이트는 내게 그렇게 고된 일주일을 보내고도 어떻게 낚시까지 갈 수 있냐고 묻곤 했다. 나는 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흔히들 말하는 ‘경상도 사람’이었다. 여러 경상도 사람을 봐왔지만 그 중에서도 아버지는 특출나게 무뚝뚝하신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내게 먼저 낚시를 가자고 하셨다. 아버지 나름대로 수줍게 먼저 내민 교감의 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그리고 왠지 아버지와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삼남매 중에서 아버지와 가장 사이가 좋았다. 중학교 2학년 겨울,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공부를 줄곧 열심히 해서 아버지는 내게 잔소리 한 번 안 하시고 나를 항상 믿어 주셨다.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문자 하나만 달랑 남겨 놓아도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말 외엔 별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고등학생 시절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침대에서 골골거려도 별 말 없이 라면을 끓여 주시기도 할 정도였다. 그래서 딱히 아버지와 나 사이에 트러블이 생길 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대학교에 와서 아버지가 종사하시는 분야인 생명과학과에 진학한 것도 아버지와 친해지는 데 한 몫 했다. 물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생명과학과에 진학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내게 생명과학과로 진학하라고 하신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떤 교수님께서는 내게 그러셨다. 자식이 같은 분야에 종사하여 자식과 일에 관한 얘기를 공유할 수 있다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다고. 이런 이유로 나는 삼남매 중에 가장 아버지와 유대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다른 집의 부자지간처럼 막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우리 삼남매는 전체적으로 다른 집의 부모 자식 관계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칠 정도로 아버지와 안 친했다. 아버지가 무뚝뚝하셔서 그러기도 했다. 어릴 땐 아버지의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았고, 아버지는 사촌 형누나들에게 호랑이 삼촌이라고 불릴 만큼 무서운 분이셨다. 말을 하실 땐 경상도 특유의 말투로 화를 내는 듯한 억양이 있었기에 쉽게 친해질 수 없었다. 특히, 엄마는 우리와 친구처럼 지냈던 데 반해 아버지는 우리보단 일에 열중하셨기 때문에 엄마가 살아계실 땐 아버지와 시간을 같이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한들 쉽게 친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삼남매가 아버지와 친해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저지른 실수 때문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하루는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오셔서는 우리 삼남매를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아빠가 요즘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는데 만나지 말라고 하면 안 만나겠다’고 했다. 마치 큰 인심이나 쓰는 듯이 말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그때로 말할 것 같으면 어디서 누군가가 엄마 얘기를 꺼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를 때였다. 힘들면 밤마다 달을 보며 엄마 생각하며 울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아버지의 어처구니 없는 얘기를 들은 누나와 동생은 그 자리에서 말 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듣던 중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다급히 내 팔을 잡았지만 나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팔을 뿌리치고는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엄마를 그리워하는 눈물을 보이기 싫었다.

그 뒤론 삼남매끼리 성인이 되어 술을 마셔도 그날의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아마 우리 삼남매에게 너무도 큰 상처가 됐던 것이리라. 나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 얘기를 꺼낸 그날 이후로는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평소 아버지는 가정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엄마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매일 술을 마시고 속을 썩이는 사람도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엄마가 돌아가신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다른 여자를 만난다고 하니, 더더욱 아버지를 미워하게 됐다. 그때의 일이 머리를 스칠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의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됐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가 저질렀던 여러 일들을 총 동원해서 아버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마냥 아버지와 등지고 살 수는 없었다. 그날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미워할 수밖에 없지만, 보호자라고는 아버지밖에 없는 우리가 그때의 일을 굳이 계속 상기해가면서까지 아버지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그때의 일을 기억에서 지우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아버지마저 미워하면 부모님을 둘 다 잃는 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내게 참 애증의 사람이었다. 마음 속 저 깊숙이 증오심을 가지고도 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무리해서라도 아버지와 낚시를 간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농어 낚시를 하러 새벽 3시 30분 정도에 인천 남항 부두에 도착하면 선원 기록부를 작성하고 출항 시간까지 기다렸다. 배는 새벽 4시에 출항했고, 농어 낚시를 하는 곳까지 가려면 배를 타고 2시간 가까이 나가야 했다. 전날 연구실 출근에 축구 대표팀 훈련까지 고된 일정을 마치고 거의 자지 못한 내겐 배를 타고 나가는 2시간이 조금 길게 느껴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노래를 들었다. 나는 공일오비, 김광석, 이승환, 유재하 노래를 즐겨 들었다. 옛날 노래만의 묵직함이 좋았다. 배 엔진의 가벼운 소음을 묵직한 노래로 눌렀다. 노래를 들으며 조그맣게 따라 부르다 보면 어느새 배에 같이 탄 아저씨들이 낚시 준비를 시작하곤 했다.

그날의 낚시 성과는 같이 배에 탄 선원들의 실력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같이 배에 탄 다른 선원들의 실력이 꽤 좋아야 했다. 흔히들 다른 선원들의 낚시 실력이 형편 없으면 오히려 더 많이 잡을 수 있는 거 아니냐, 남들이 못 잡는 고기들 내가 다 잡으면 되는 거 아니냐, 생각할 것이지만 농어 낚시는 달랐다. 농어는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선원 중 한 명이 농어를 놓치기라도 하면 그 농어떼는 모두 달아나버린다. 그래서 누군가 농어를 놓치면 선장님뿐만 아니라 다른 선원들까지 눈치를 줬다. 농어 낚시는 그야말로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참 피곤한 낚시였다.

그래도 낚시를 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했다. 아버지와 나는 본디 참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반면 아버지는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책에도, 드라마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우리 부자가 무언가를 함께 해본 기억이 딱히 없었다. 그런 우리 부자가 함께 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게 바로 낚시와 목욕탕을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공부하느라 바쁜 나머지 낚시도 목욕탕도 자주 가지 못했다. 대학에 와서도 매 주말마다 축구에 미쳐서 집에 잘 안 갔으니 아버지와 무언가를 같이 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농어 낚시는 오랜만에 찾아온 부자의 데이트 시간이었다.

14시간 동안의 긴 데이트를 끝내고 오후 6시쯤에 육지에 돌아오면 땅이 파도 치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그런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우리 부자는 매번 연안 부두 앞의 한 횟집으로 향했다. 아주머니 한 분이 하는 자그마한 식당이었다. 그 식당에 우리가 잡은 물고기를 맡기면 아주머니는 언제나 그랬 듯 잡은 물고기 모두 회를 뜨고 남은 대가리와 내장 등을 이용해서 매운탕을 준비하셨다. 우리는 그동안 바로 옆 건물에 있는 해수탕으로 향했다. 우리 부자는 가서 땀으로 젖은 몸을 식히며 해수욕을 즐겼다.

목욕을 마치고 식당에 가서는 냉장고에서 자연스레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병을 꺼내 들고 자리에 앉았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나는 처음 자리에 앉으면 첫 소맥 두세 잔 정도는 단번에 비워냈다. 8월의 바다는 바닷물에 반사된 햇빛까지 우리를 향했기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리게 되고, 물을 많이 마셔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는 암묵적으로 낚시가 다 끝나갈 무렵부터는 물을 잘 마시지 않았다. 꾹 참다가 마시는 이 소맥의 맛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회를 안주 삼아 소맥을 몇 잔을 더 들이키다가 아버지가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내셨다.

“학교 생활은 어때?”

“괜찮아요”

“애로사항은 없고?”

“네”

“돈은 안 부족하고?”

“돈도 뭐, 네”

“음.. 그래”

술에 취하기 전엔 말주변이 없는 아버지는 항상 비슷한 레퍼토리로 대화를 열었다. 그리고는 또 별 말 없이 회랑 매운탕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이 때까지도 여느 때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런데 그날 따라 다른 점은 식당 아주머니가 우리 식탁에 같이 앉으셨다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느닷없이 내 옆에 앉더니 술 한 잔 따라 달라고 하셨다. 휴가철이라 요새는 식당에 사람이 없단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대화를 이끌어 가셨다.

“아들이랑 이렇게 같이 낚시 다녀서 좋겄네~ 아들은 학교 다녀?”

“네”

“4년제 다니는 거여?”

“네, 뭐”

그리고는 아버지와 아주머니 사이에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아주머니가 몇 살이고, 고향은 어디고, 남편은 무슨 일을 하고, 등등의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그런 내가 신경 쓰였는지 다시 내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아들 몸도 튼튼해 보이는데 아들 운동하나~?”

“네 학교에서 축구 동아리 하고 있어요.”

“어유 아들 운동도 잘하고 몸도 튼튼하고 4년제면 공부까지 잘했겠네”

비슷한 맥락의 어색하고 불편한 이야기가 짧게 오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주머니는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려 당황스러운 말을 꺼냈다.

“아들 때문에 엄마가 아주 좋아하시겄어”

아버지와 나는 엄마 얘기를 나눠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 얘기를 하다 보면 아버지를 아주 미워하게 될 것 같아서 아버지 앞에서는 엄마 얘기를 최대한 삼갔다. 아버지도 우리 앞에서는 엄마 얘기를 먼저 꺼내시지는 않으셨다. 그런 우리 앞에서 엄마 얘기를 꺼낸 것이다. 나는 아주머니의 그 말을 듣자마자 내심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아버지의 얼굴을 슬며시 보았다.

“아니 뭐 그건 다른 문제고 ∙∙∙∙∙∙”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화제로 대화를 전환했다. 나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역시나’ 했다. 저 깊숙이 숨어있던 아버지에 대한 안 좋은 생각들이 또다시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누군가 무심코 내게 저런 질문을 던졌다면 나는 적잖이 당황했을 텐데. 적어도 저렇게 표정이 자연스러울 수는 없었을 텐데.

밥을 다 먹고 나갈 때쯤엔 내가 대리운전기사를 불렀다. 아버지는 뒷좌석의 오른쪽에, 나는 왼쪽에 올라탔다. 나는 원래 차를 타는 순간 쓰러져 잠든다. 금요일 훈련이 끝나고 거의 한 숨도 자지 않고 10시간 넘게 바다 위에서 땀 뻘뻘 흘려가며 낚시를 하고 술까지 마시니 나는 항상 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좀 달랐다. 술을 마시면서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까 그 일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 그랬는지,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나름의 화해를 시도한 것이다. 아버지를 용서하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고, 아버지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도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자, 하는 내 다짐의 행동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원래 노래 듣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그날은 내 이어폰 한쪽을 냉큼 받으셨다. 첫 곡은 아버지의 선곡이었다. 박상민의 ‘지중해’라는 노래였다. 아버지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으셨는지, 하이라이트 부분에서는 창문을 열고 열창을 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내 마음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애와 증이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노래가 끝이 났다. 다음 노래는 내가 선곡할 차례였다. 아버지는 요즘 나오는 힙합이나 아이돌 노래에는 관심이 없을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아침에 배에서 듣던 공일오비의 ‘슬픈 인연’을 틀었다.

멀어져 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린 어떻게 잊을까

노래를 듣고도 아버지는 한참동안이나 반응이 없으셨다. 그저 창 밖의 풍경만 말 없이 바라보실 뿐이었다. 이 노래를 모르시는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슬픈 인연은 90년대를 대표하는 공일오비의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였다. 박상민의 지중해를 아는 사람이 이 노래를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건가 싶어서 노래 볼륨을 두 단계 높였다.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아버지를 다시 쳐다보았다. 당황스럽게도 아버지의 옆 얼굴엔 슬픔 비슷한 것이 어려 있었다. 느닷없는 슬픔이라니 내가 많이 피곤한가, 싶었다. 아버지의 옆 얼굴을 천천히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흘끗 돌아 보셨다.

“다른 노래 들으면 안 돼?”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본 날이 떠올랐다. 엄마는 투병 생활을 꽤나 힘겹게 하셨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는 안방에서, 아버지는 내 방에서 주무셨다. 그날 난 침대에서 잘 준비를 하고 누워 있었다. 문이 우당탕 열리고, 술을 마신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나는 아버지가 술 냄새를 풍기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시는 게 싫어서 얼른 자는 척했다. 아버지는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오셔서는 말 없이 이불을 깔고 누우셨다. 조금 뒤, 아버지는 조금씩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울부짖으셨다.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도 그 울음 소리 속에 숨어 소리 없이 울다가 잠들었다.

잊고 있던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하루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내게 안동에 사시는 큰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 앞에 있는 포장마차인데 잠깐 나오라는 것이었다. 포장마차엔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넌 괜찮지?’”

큰아버지가 내게 소주 한 잔 따라 주시며 물으셨다.

 나는 술을 넙죽 받아 먹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큰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고 씩씩해서 보기 좋다고 하셨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의 장례식 때 큰아버지가 작은할아버지에게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내내 그랬어요,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자기가 대신 아프고 싶다고…”

그 뒤로도 많은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내게 외면당해왔던 기억들이 모두 흘러나와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나쁜 생각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다른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온갖 나쁜 생각들로 저 깊숙이 뭉쳐놓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서서히 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올해 어버이날 편지에 나는 아버지께 이렇게 적었다. 올해 동생까지 성공적으로 대학에 입학시키느라 수고 많았다고, 환갑도 되지 않은 나이이기에 이제부턴 아버지가 원하는 걸 하면서 사시라고, 그게 무엇이든 응원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어버이날 다음날, 누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 아빠한테 편지에 뭐라고 적었어?”

“별 얘기 안 적었는데…”

“아빠가 아침 먹는데 갑자기 말하더라고. 너가 편지에 쓴 대로 하겠다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나는 이제부터라도 아빠가 원하는 거 하면서 살라고 적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신 거 보면 아마 연애하려고 하시나 보네”

“아아 그래 알았다”

누나는 아버지의 연애 얘기를 듣고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그랬다. 부모님이 한 사람으로 보일 때가 철든 거라고.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그 집안일이라고는 모르시던 아버지가 이제는 가정주부가 다 됐을 만큼 긴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철없다고만 생각했던 누나는 벌써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도, 슬픈 인연 속에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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