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생명과학과 12

이주형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렇게 돼요? 멋대로 떠든 것들 좀 주워들었기로서니 그게 제 얘기도 풀어야 할 이유가 되나요? 뭐요? 양심이 없어? 나 참, 기껏 맛있게 잘 먹어드렸더니 도로 다 뱉어내라는 건 또 무슨 심보래요. 그럼요, 사주는 거 맛있게 잘 먹어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요. 고마운 줄 좀 아세요. 아유 알았어요, 알았어. 가만 냅두면 또 한 달은 귀찮게 할 게 뻔하니까 그냥 아무 얘기나 하나 던져드리지 뭐. 그 전에 잠깐, 딱 요거 한 잔만 다 마시고요. 목구멍에 기름칠은 양껏 했는데 그래도 말 잘 나오는 데는 기름보단 술이더라고요.

 

자, 그럼 장르부터 한 번 골라봐요. 요새 저 사는 게 스릴러라서 그런 쪽은 자신 있어요. 양념 조금만 치면 호러까지 커버할 수 있고요, 어떻게 잘 찾아보면 힐링 스토리도 조금 있고 아마 별로겠지만 액션도 돼요. 부조리물, 사회풍자물 이런 거? 소재야 넘쳐나죠. 그냥 오늘 아침에 출근한 얘기만 해도 한 편은 족히 나오지 싶은데요. 네? 로맨스요? 에헤이 저 요새 그런 거 없어요. 다 알면서 일부러 그러셔. 글 쓸 때도 그쪽으론 잘 못 쓰는 거 봤잖아요. 지들끼리 막 비웃어대고 별 난리는 다 쳤으면서.

 

아니, 이 사람들이 아까부터 왜 이래? 제가 언제 꼴에 누구랑 잘 된 이야기, 찌질하게 누구한테 차인 이야기 이런 거 들려달라 한 적 있어요? 별 재미도 없는 거 갖다가 저 혼자 신나게 떠들어놓고 왜 나한테 주제 통일을 요구해요? 아니 그렇게 몰아가지 좀 마요.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진짜로 말할 만한 껀수가 없다니까 그러네? 아휴, 정말 내가 어쩌다 아직 이 진상들이랑 이러고 있나 몰라. 아, 물론 고기는 맛있습니다. 열심히 더 먹겠습니다, 선배님. 선배님 최고!

 

아, 그런데 여기 진짜 맛있긴 하네요. 이렇게 맛있는 거 먹으니까 뇌에도 자극이 오나 봐. 풀만 한 얘기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우리 친애하는 청자 여러분이 기대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단 넓게 보면 로맨스인 이야기인데. 어때요, 그 정도면 되겠어요? 나도 더는 양보 못 해요. 안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못 한다고요. 뭐가 있어야 얘기를 할 거 아냐. 없으면 지어내라니, 픽션 듣고 싶으면 책을 사서 보지 왜 여기 앉아 있어요?

 

흠흠, 그럼 대충 다들 동의한 걸로 알고 시작합니다. 그 사람 처음 만난 건… 이름요? 말해주면 여기저기 검색해볼 거잖아요.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어쨌든 다시, 그 사람 처음 만난 건 무슨 독서 모임에서였어요. 혼자서 책 읽으니까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가서 무슨 모임 있나 대충 둘러봤었거든요. 쓱 보니까 요 근방 독서 모임은 주로 어려운 인문학 서적 같은 거 잡고 공부하듯이 읽는 곳들이더라고요. 제 취향이랑은 좀 안 맞았죠. 그런데 그런 모임이 바글대는 와중에 좀 가벼운 모임이 하나 눈에 띄었어요. 그냥 읽고 싶은 책 읽어와서 서로 소개해주는 모임이었는데, 저한텐 그 정도 무게가 부담스럽지 않고 딱 좋을 것 같아서 일단 나가보자 하고 가입했지요. 그런데 웬걸, 첫 모임에 나가보니 생각했던 거랑 모임 분위기가 너무 다른 거예요. 일단 가져온 책들부터가 좀 그랬어요. 저는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이라고 하면 주로 소설 종류거나 인문학이나 심리학 쪽 대중 교양서 뭐 이런 거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맞아요.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했던 거죠. 내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 하고요. 그래도 나름 웹 소설이나 라이트노벨 등등 들고 오는 정도까지는 각오했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거기서 제일 인기 있는 게 어떤 책들이었는지 알아요? 자기계발서였어요, 자기계발서. 주식으로 돈 버는 법, 부동산 투자, 재테크 비법 무슨 파동에서 살아남는 무슨 생존법… 뭐 이런 거요. 자기계발서를 싸그리 다 매도할 생각은 없지만, 독서 모임에 그런 책을 들고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서 좀 당황했죠. 내 사고방식이 주류일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을 때의 당혹감?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래도 처음엔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 했어요. 하긴 요즘 세상 살기 팍팍하니까 이런 책이 더 인기 얻는 거겠지, 내가 안 읽는 책들이라고 무조건 깎아내릴 수는 없는 거야, 하고요. 그러고 있는데 세 번째인가 네 번째 발표한 사람이 꺼낸 책은 정말, 보자마자 가슴이 싸해지더라고요. 한번 맞춰볼래요? 그 사람이 뭐 가져왔었는지. 전공서? 꼭 본인 같은 생각만 하시네, 정말. 전공서였으면 좀 웃기고 황당하긴 했어도 그렇게 정나미가 떨어지고 그러진 않았을 거예요. 성경? 제가 종교는 없지만, 성경 읽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경멸하진 않아요. 뭣보다 성경 읽고 싶은 사람이면 그냥 성경 읽기 모임에 나갔지 않을까요? 네? 오… 그건 좀 비슷했어요. 그 사람이 꺼낸 건 긍정적인 마음이 우주와 감응해서 행운과 성공을 불러온다는 한물간 사이비 성공 신화 책이었거든요. 진지한 얼굴로 '우리가 생각을 잘못해서 이렇게 사는 거다, 다 우리 탓이다' 하고 얘기하는 모습, 그리고 거기에 끄덕대고 감탄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긍정이고 나발이고 거기서 당장 일어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뿐인가, 여자가 입만 열면 속 보이는 얕은 수로 떠보려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어요. 넓은 집 사고 싶다고 말하면 '누구랑 들어가려고 그렇게 넓은 집을 좋아해요?' 하며 능글대고 어디 여행 가고 싶다 하면 어떻게든 같이 갈 건수 잡으려고 '차는 있냐, 나는 있다. 데려가줄 수 있다' 하는 식이었죠. 모임 모집 문구에 '연애나 포교 등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사절합니다'라고 쓰여 있어서 조금 안심하고 갔었는데, 그때 가서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니까 그런 문구를 썼겠구나 싶더라고요. 생각이 짧았던 거죠.

 

아 쫌 기다려 봐요. 일단은 로맨스 맞다니깐요. 왜이렇게 참을성들이 없어요? 자꾸 그러면 저 그만합니다? 어쨌든, 처음 절반 정도 인원이 발표할 때까지는 정말 다음 모임엔 절대로 안 나와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 차례도 그냥 대충 넘겨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고요. 제가 그때 읽어 간 책이 꽤 진지한 소설이었는데 여기서 이런 책 얘기하면 분위기는 분위기대로 어색해지고 듣기 싫은 농지거리나 듣게 될 것 같았거든요. 노래방에서 다들 신나게 댄스곡만 부르는 와중에 박자가 네 배는 늘어지는 발라드를 불러야만 하는 상황이었달까요. 그래서 딱 '이런 소설을 읽었는데 이런 상도 탄 책이라더라. 뭐 대단하긴 한데 인생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여러분처럼 도움되는 책을 읽을걸 그랬다. 하하. 호호'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고 대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 바로 앞에 발표한 사람이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을 가져온 거예요. 맞아요, 반갑긴 했죠. 그런데 그때 저는 이 모임 자체에 되게 실망해 있었거든요. 그래서 반가움보다도 '이것 봐라?' 하는 거만한 마음이 더 강하게 고개 내밀었어요. 덤으로 이 사람이 나 대신 총알받이가 되주겠구나, 하는 못된 마음도 들었고요. 그래서 저는 겉으로는 공손하게, 하지만 속으로는 뒤로 기대어 팔짱을 낀 것 같은 태도로 그 사람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었어요. 앞서 짙게 깔린 실용주의적 분위기를 갑자기 깨부수지 않고도 소설에 대한 감상을 유창하고 진지하게 이어나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지요. 적절한 위트 조금에 부드러운 질문 몇 마디까지 넣으니 좀 전까지 돈 얘기만 하던 사람들도 조금은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되니까 제가 마음 속으로 꼈던 팔짱도 어느새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어요. 곧이어서는 겨우 책 몇 권으로 사람 판단하고 내심 오만한 태도로 있었던 제가 부끄럽게 느껴지기까지 했죠. 겉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한 미소만 띠고 있었지만 마음 속 저는 이미 책상 밑에 기어들어가 부끄러움과 미안함으로 질식해가고 있었어요. 그런 상태였으니, 마침내 그 사람 이야기가 끝나고 제 차례가 왔을 때에도 심장이 차갑게 떨리는 느낌에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 차례는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제 담력이나 말재간보담도 앞 사람이 분위기를 제대로 바꿔주고, 제 차례에 도움까지 준 덕분이었죠. 사실 처음에는 갈라진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추임새를 딱딱 넣어주니까 시간이 갈수록 신나게 얘기할 수 있었어요. '맞아요, 저도 그런 점이 좋았어요.' '저는 그런 생각은 못 했는데 정말 생각해볼만한 주제인 것 같아요. 이러이러한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하려 했던 이야기는 진작에 다 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통찰까지 몇 가지 얻은 채로 발표는 이미 끝나 있더라고요. 나름 만족스런 기분으로 차례를 넘기고 나니 그 뒤에도 저랑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몇 나와서 발표하는 걸 볼 수 있었어요. 물론 그 사람들도 적절한 추임새 속에서 분위기 깨는 일 없이 발표를 잘 끝마쳤죠. 모임 후반부가 그렇게 진행되니, 첫인상과 달리 저는 그 모임에서 그럭저럭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수 있었어요.

 

그래도 집에 돌아오고 나니 그 모임에 계속 나갈지 말지 고민은 됐어요. 마지막엔 좀 재밌었다 해도 첫인상이 워낙에 강렬했으니까요. 며칠 내내 떠올렸다 미루다 생각하다 미루다 하다 결국 두 번째 모임 전날에 일단은 계속 나가보기로 했지요. 아녜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결정이었어요. 제가 첫눈에 반하는 타입으로 보여요? 만약 진짜 그랬으면 고민할 게 뭐 있었겠어요. 그냥 무조건 나갔겠죠. 그때는 그 사람에 대해서 그냥 '아, 멋대로 깔본 거 너무 부끄럽다', '그래도 덕분에 재밌었다' 정도 생각만 했지, 호감이 생기거나 한 건 전혀 아니었어요. 정말이라니까요? 계속 나가게 된 결정적 이유는 사실 그 사람이 아니라 돈이었어요, 돈. 돈 아까워서요.

 

그거, 카페 사장이 운영하는 모임이었거든요. 한 달 치 회비를 미리 받고 대신 모임에 음료를 제공해주는 시스템이었지요. 달에 오만 원이었나? 큰돈은 아니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버리기엔 아까운 돈이잖아요. 그야말로 계륵. 처음에야 너무 실망스러워서 돈이고 나발이고 다신 안 나와야지 했는데 그래도 이미지가 최악에서 조금 나아지니까 본전 생각이 났어요. 모임 자체가 좀 별로더라도 원래 목적은 강제로라도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거였으니까 독서량만 늘면 그만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뭐, 그렇게 됐어요.

 

사실 2주 차 모임에 나갈 땐 약간 기대도 했어요. 첫인상은 최악이었지만 어쩌면 이 모임에 좋은 인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모임 후반부의 분위기를 이어 점점 여기가 좋아질지도 모른다,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역시나, 시간이 지나도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어요. 물론 1주 차 모임에서 뭔가 자극받은 게 있는지 소설이나 시집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늘긴 했었어요.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점은 변함없이 그대로였지요. 이 모임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 보다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책을 핑계로 삼은 사람들의 모임'에 가깝다는 거 말이에요. 나는 책 얘기나 더 하고 싶은데 자꾸 내 사생활을 짜내려 하고, 또 듣고 싶지도 않은 자기 이야기를 억지로 쥐여주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불편했어요. 물론 그런 게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사교성 넘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저는 천성적으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아웃사이더라 그 모임이 도저히 편해지질 않았어요. 그래서 딱 돈 낸 만큼만, 그러니까 4주만 나가고 그 모임에 계속 나가지는 않았죠.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여기서 끝일까 봐요? 설마, 저도 양심이 있는데요. 그 모임과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었지만 그 사람과는 끝이 아니었어요. 새로 만든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볼 수 있었거든요. 책 취향이 맞는 몇 사람이랑 각자의 지인 몇 명 정도를 더해서 따로 만든 거였지요. 물론 그런 걸 제가 나서서 만들진 않았어요. 네, 예상하셨다시피 그 사람이 주도한 거였죠. 제가 5주 차 모임에 안 나갔더니 얼마 안 가서 그 사람한테 연락이 오더라고요. '얘기 나눌 때 너무 즐거워서 좋았는데 이제 안 나오신다니 아쉽다', '내가 몇 사람 모아서 다른 모임 만들려 하는데 혹시 관심 없느냐'고 했지요. 뭐야, 반응 왜 이래요? 그렇게 호들갑 떨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 불쑥 전화로 연락한 줄 알았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여간 성급하시기는. 번호 교환 같은 거 안 했으니까 로맨스라기엔 설익었고, 그렇다고 저 몰래 연락처 알아낸 것도 아니니까 반전 스릴러랑도 거리가 멀답니다. 그냥 톡이었어요, 톡. 카톡이요. 요새는 뭐만 하면 톡방부터 만들잖아요? 제가 그만둔 그 모임에도 톡방이 있었는데 그걸 통해서 갠톡으로 연락한 거였어요. 어쨌든, 그때 휴대폰 화면에 뜬 그 사람 문자를 보면서 조금 생각해봤죠. 그 사람이 그렇게 피하고 싶은 사람도 아니고, 독서도 계속하긴 해야 하고, 그 사람이 부른 몇몇 이름을 보니 취향도 그럭저럭 잘 맞을 것 같고… 이것저것 따져봐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아서 결국 저는 좋다고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화 아니고 톡이었는데도?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요. 새로 뭘 만드는 김에 절 부른 게 아니라 저를 부르기 위해 모임을 하나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에요. 그래도 그때는 혹시라도 혼자 김칫국 마시다 체하는 꼴 될까 봐 일부러 그런 생각은 안 하려 애썼어요. 지금도 그 사람이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가졌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후로 그 사람과 제가 더 자주 보게 됐다는 거예요. 제가 아무리 겉도는 기질이 있다지만 취향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놀다보니까 아무래도 좀 더 빠르게 친해지고, 그러니 정기 모임 외에도 모여 노는 일이 꽤 생기고, 특히 그 사람이랑은 취향도 잘 맞고 말도 잘 통하다보니 얼마 안 가 둘이서도 따로 밥 한 끼, 차 한 잔 정도는 하게 되더라고요.

 

솔직히 한눈에 제 취향인 사람은 아니었어요. 제가 첫눈에 반하는 타입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그 사람한테 당장 반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가까워지다 보니 장점이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일단 사람이 참 싹싹했어요. 다 같이 간 식당이나 술자리에서 자리 세팅을 도맡아 하는 건 기본이고 누가 뭘 싫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얘기를 까먹는 법이 없었어요. 늘 기억해놨다가 좋은 건 더 해주고 싫은 건 피하게 해줬죠. 새우 싫어한다는 말을 지나가듯이 한 번 한 적 있는데 어떤 술자리에서 제 쪽으로 새우 들어간 안주가 제 쪽으로 서빙되니까 대번에 일어나서 저 먼 자리까지 보내버리더라고요.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저를 생각해서 그랬던 걸 거예요. 또 한 번은, '난 반짝이는 거라면 금이나 은보다도 구릿빛이 더 좋더라'라고 했었는데 그러고 얼마 후에 지나가다 생각났다며 황동 팔찌를 사 온 일도 있었네요. 일일이 기억하고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그런 사례가 많았어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항상 남을 배려하려는 게 눈에 띄는 사람이었죠. 게다가 웃기는 또 어찌나 잘 웃던지요. 항상 허허 하고 웃고 다니는데 자꾸 보다 보면 어이가 없어서 같이 웃게 되는 사람이었어요. 그렇다고 마냥 실없는 사람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요. 자기 주관이 뚜렷해서 굽힐 수 없는 지점에선 웃음기를 거둘 줄도 알았어요.

 

시간이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그런 점들이 점점 제 맘에 스몄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그 사람은 누구나 배려했고 항상 친절했지만 저한테는 특히 더 그랬거든요. 착각 아니에요. 저도 처음엔 자의식과잉이려니 했는데 지나면 지날수록 확실히 저한테는 더 잘해주는 게 보였어요. 뭐라 해야 할까, 한마디로 말하긴 애매한데… 예를 들자면 식당에서 남들한테는 휴지에 수저 깔고 물수건 나눠주고 물컵 채워주는 정도라면 저한테는 거기다 더해서 손에 메뉴 쥐여주고 '이거 들어간 거 좋아한다 하시지 않았어요?' 하고 제가 딱 좋아할 만한 메뉴를 조용히 추천해주고는 알게 모르게 저한테 유리하게 상차림 해주는 정도였달까요. 알아요, 말해놓고 보니까 이것도 여전히 미묘하긴 하네요. 그래도 한두 번도 아니고, 식당에서만 이러는 것도 아니고 매번, 모든 장소에서 이런 식이면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사실 그 미묘함이야말로 저를 조금씩 끌어들인 핵심인 것도 같아요. 만약 조금만 더 과했으면 금방 동네방네서 다 눈치채고 우릴 엮어주네 마네 부담스럽게 난리 났을 거고 그럼 저 같은 겁쟁이는 슬쩍 발을 빼버렸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걸 알고 그랬는지 원래 그런 사람인 건지 이 사람은 선을 넘는 법이 절대로 없었어요. 그렇게 몇 달, 언제부턴가 우리 사이엔(그래요, 우리. 이런 거 가지고 놀리지 좀 마요. 유치하게) 직접 입에 담진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게 꽤 마음에 들었어요.

 

중요한 건 여기부터예요. 아른대기만 하던 관계의 문턱이 점점 선명하게, 겨우 몇 발짝이면 넘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어떤 날이었어요. 일상적으로 연락을 하다 둘이 카페에서 만나 한담이나 나누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제가 책을 낸 적 있다는 걸 말하게 돼버렸어요. 어쩌다 그랬더라? 아, 기억난다. 아마 맞은편 서점이 예쁘단 얘기 하다 굽이친 대화 주제가 인세 얘기까지 갔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도 책이나 하나 써볼까요? 대박까진 안 나더라도 한 권 써놓으면 두고두고 인세 들어올 테니 생계에 도움 좀 될 것 같은데. 물론 대박도 나면 더 좋고, 손해 볼 건 없는 것 같아요.' 그 말 들으니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어요. '인세?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제가 예전에 한 권 내봤는데, 그게 또 그렇게 망한 책도 아니었거든요? 근데 지금 내 통장에 꽂히는 인세가 얼만 줄 알아요? 요번 달에 들어온 거론 이 커피도 하나도 못 사요. 도움은 무슨, 화분에 벼 한 대 키워서 밥솥에 넣으면 생계에 도움이 되겠어요? 게다가 그게 키우기 엄청 까다로운 품종이라면, 손해 볼 건 없다는 소린 절대 못 하실걸요?' '어, 책 내셨었어요?' '아' 그렇게 된 거죠. 평소 같았으면 그냥 어디서 들었는데, 아니면 책에서 봤는데 웬만해선 인세 얼마 나오지도 않는다더라, 하고 매끄럽게 넘어갔을 텐데 저도 내심 자랑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마음이 열리니 머리가 허술해진 건지 제 책 얘기를 나불나불해버린 거예요. 실수라 얼버무리기엔 너무 대놓고 말해서 결국 술술 다 불었죠. 취미로 쓰던 게 어쩌다 눈에 띄어 출판된 거다. 망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많이 팔리지도 않았다. 별로 볼만한 건 못 된다. 그렇게 안절부절 얘기했으니 제가 책 보이기 부끄러워하는 건 진작에 눈치챘겠죠. 그러니 그 사람은 배려해준답시고 별 흥미 없는 척 대꾸를 해주긴 하는데 눈빛이며 몸짓에서 아쉬움이 아주 그냥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그러니 제가 어떡하겠어요?

 

네 맞아요. 그래서 그날 제 책을 선물해줬어요. 마침 집 근처라 그냥 잠깐 들러서 쌓여있는 재고 중 깨끗한 거로 한 권 골라서 줬죠. 솔직히 아는 사람한테 제 글 보이기가 많이 부끄럽기는 했어요. 이런 성격에 출판은 어떻게 해냈나 저도 궁금할 정도라니까요. 그래도 내버려 두면 어차피 찾아볼 거 같기도 하고, 그럴 거면 그냥 내가 선물해주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해서 눈 딱 감고 그냥 내준 거예요. 내 앞에서 읽기 시작했다간 앞으로 다시는 날 볼 수 없을 테니 절대 지금 펼치지 말고, 당장 가방에 집어넣고 나중에 집에 가서 꺼내 보든가 아니면 갖다 버리든가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은 웃으며 알았다 그러곤 유리 다루듯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더군요. 제가 그만큼 부끄러운 티를 냈더니 받을 때 고맙다는 말 말고는 더 언급도 않아 줬어요. 덕분에 얼마 안 가서 책을 줬단 사실 자체를 거의 잊어버릴 수 있었지요. 최소한 그날 하루 동안은 말이에요. 그런데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딱 눕는 순간 갑자기 책 생각이 퍼뜩 떠오르면서 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어요. 내 글을 읽고서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가도 또 그 반응을 절대로 듣고 싶지는 않은, 복잡하면서 단순한 기분이었지요. 좀 신기하더라고요. 댁들한테 책 줬을 때는 그냥 제발 내 앞에서 입만 다물어줬음 좋겠단 생각만 들었는데 이 사람 반응은, 무서우면서도 자꾸 궁금해지는 게요. 물론 아주 오래 가는 기분은 아니었어요. 기껏해야 며칠 즐길 수 있는 설렘 같은 거였죠. 아무리 설레고 불안한 마음이래도 별다른 피드백 없이 상관없는 일상만 켜켜이 쌓이다 보니 나중엔 책을 줬단 사실조차 가물가물해지라고요. 새 눈 내리면 금세 묻히는 발자국처럼요.

 

그런데 어느 날엔가 그 사람 집에 들어가 볼 일이 생겼어요. 무슨 생각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때까지도 우리 관계는 적어도 '그런' 방향으로는 진전이 없었으니까요. 그날은 그냥 모임 끝나고 근처에 모여서 마시다가 시간이 늦어 가장 가까운 방으로 옮긴 거였어요. 다음날이 연휴의 시작이었던지라 사람이 꽤 많았던 거랑, 예정에 없이 방문한 거였는데도 그 사람 집이 참 깔끔했던 게 기억나네요. 사람들이 금방 어질러버리긴 했지만 말이에요. 사실 그렇게 자세히는 못 봤어요. 너무 둘러보는 건 예의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이미 상당히 취해있었던 저희는 오지랖 부릴 겨를도 없이 주섬주섬 술상부터 차려 둘러앉았거든요. 낮에는 포근하다가도 밤이면 제법 쌀쌀해지는 시기였던지라 처음엔 다들 겉옷 껴입고 난방을 트네마네 옥신각신 바빴어요. 그런데 온몸으로 뜨끈한 술기운 뿜는 사람들이 꽉 들어차 떠드니 방 한 칸 정도는 금세 열기로 가득 차 버리더라고요. 계절은 이미 시월 한복판을 걷고 있는데 그 방에 만은 한여름이 덜 깬 꿈처럼 찾아와 있었어요. 그렇게 되니 다들 난방 얘기는 까맣게 잊고서 어느새 하나둘 겉옷을 벗어 던지더라고요. 코앞에 다가온 겨울을 잠시 잊고 여름을 즐기려는 것처럼요. 그런데 저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뭐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그날 제 복장이 문제였어요. 상의라곤 속옷이랑 두꺼운 옷 한 장 달랑 걸친 게 다였던지라 거기서 뭘 더 벗을 수가 없었거든요. 날씨가 애매하다고 옷까지 애매하게 입고 나온 게 실수였던 거죠. 사람들은 계속 떠들고, 얼굴들은 한여름 꽃들처럼 노랗게 빨갛게 들떠가고, 방 안 공기는 시간을 거스르듯 자꾸만 더 여름으로, 마침내는 팔월의 가장 더운 날처럼 뜨겁고 눅눅해져만 가는데 저는 저 멀리 김 서린 창문만 바라보며 별 의미도 없이 손바닥이나 팔락댈 수밖에 없었어요. 그냥 창문 좀 열어달라, 추우면 자리 바꿔 달라고 말을 하든가 아니면 직접 가서 창문을 열든가 하면 됐을 텐데, 저도 취해서 그랬는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어요. 왁자지껄한 가운데 소리 높여 청하기도 싫고 바글대는 몸뚱아리들 틈을 비집고 왔다 갔다 하기도 싫었지요. 그렇게 참다 참다 등에 찬 땀이 미끈대는 느낌에 진저리가 나서 결국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다 싶어 바깥으로 뛰쳐나갔어요. 창문은 멀어도 문은 가까운 자리였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요. 아이고, 또 지레짐작! 누가 따라 나오거나 하진 않았어요. 틀에 박힌 로맨틱한 대화도 없었고요. 스무 살 엠티도 아니고 그렇게 남들 앞에서 티 낼 나이는 진작에 지났잖아요 다들. 그냥 혼자서 술기운 빠지게 심호흡이나 해대면서 이젠 입김이 다 보이네 하다가 다시 추워질 즈음에 들어왔어요.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추운 데 있다가 다시 더운 집으로 들어서니까 안경에 김이 훅 서리더라고요. 전 평소엔 그런 건 무시하고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내버려 두는 편인데... 아, 그게 그렇게 웃겼어요?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생각 못 했네. 저는 안경닦이 꺼내기도 귀찮고 그래서 그냥 있는 거였죠 뭐.

 

어디까지 말했었죠? 아, 맞아 안경에 김이 잔뜩 서렸는데 그때는 술도 많이 먹은 상태라 그대로 계속 걷기는 영 불안했어요. 이러다 혹시 누구 다리라도 밟고 넘어지면 굉장히 부끄럽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평소완 달리 중간에 멈춰서서 소매로 안경을 닦았지요. 그러고서 안경을 딱 썼는데, 눈앞에 책장이 있는 거예요. 현관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가 쓸데없이 긴 편이었는데 거기 세워놓은 책장이었죠. 그걸 보니까 생각났어요. '맞아, 예전에 내 책 선물했었는데 그건 어디다 뒀을까?'. 술에 절여져 잔뜩 부푼 불안이 갑자기 밀려들었어요. 제대로 보관하고 있을까, 종이는 충혈되도록 울고 표지엔 냄비 자국이 누렇게 남아 부엌에서 발견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진작에 종이 쓰레기로 버려진 건 아닐까. 그런 걱정스런 생각도 들었고 혹시 너무 드러난 곳에 둔 바람에 누구 눈에 띄는 건 아닐까, 그래서 즉석에서 취객들의 낭독회라도 열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운 미래도 상상됐죠.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정신이 퍼뜩 들더라고요. 저 아시잖아요, 아무리 잘 쓴 문장이래도 누가 면전에서 제 글 읽으면 못 견뎌 하는 거. 제 앞에서 낭독회 같은 게 열리게 두느니 차라리 밥상 뒤엎고 젓가락으로 제 목을 긋고 말걸요? 하여간 그래서 저는 할 수 있는 한 정신 바짝 붙잡고 책장을 둘러보기 시작했어요. 초점을 맞추려 할수록 오히려 시야가 흐려져 갔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제 책 출간됐을 때 사진 보셨어요? 다른 책들에 비해 얇기도 하고 표지도 눈에 띄는 색깔이었잖아요. 그래서 책장에 있기만 하다면 반쯤 넋이 나간 술꾼이라 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다행스럽게도 그 생각은 딱 맞아 들었죠. 그런데, 찾게 된 곳이 좀… 생각 외의 장소였어요.

 

책장에 빈 곳이 있으면 소소한 전시장으로 쓰기도 하잖아요. 요새는 아예 그렇게 쓰라고 몇 칸쯤 달고 나오는 책장도 있고 말이죠. 그 책장에도 그런 공간이 제법 있었는데 저는 그쪽은 별로 신경도 안썼었어요. 책이니까, 당연히 책장에 꽂혀 있겠거니 싶었던 거죠. 그런데, 그렇게 책장 사이를 건너다니던 눈에 문득 익숙한 모습이 스쳤어요. 책들에서 또 다른 책들에게로 눈동자가 움직이다가, 움찔, 했다가 관성에 이끌려 목표한 곳까지, 이르렀다가 뭘 두고 온 것처럼 후닥닥 다시 그 표지로 시선이 향했지요. 착각이 아니었어요. 제 책은 거기에, 가장 가운데 전시장에, 그 전시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어요. 들어올 땐 대체 왜 못 봤나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귀여운 인형과 여행 기념품, 엽서와 티켓과 사진 들 틈바구니에 우두커니. 맞아요, 서 있었죠. 다른 책들이 서로 표지를 부비고 책지를 마주 누르며 책장에 꽂혀 있는 동안 제 책은 책등이 아니라 표지를 앞으로 하고서, 전용 받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홀로 서 있었어요. 책장이란 장소에 배치되어 있긴 했지만 누구도 그걸 '꽂아놨다'고 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건 책장에 꽂힌 책이 아니라 전시장에 세워져 보관된 전시물이었어요.

 

보존 상태는 좋았어요. 더 바랄 수 없을 정도로요. 접힌 자국 하나, 손때 하나 묻지 않은 채 깔끔하게 코팅까지 되어 있었으니까요. 코팅 위로도 먼지 한 톨 없는 걸 보니 하루 이틀 관리한 게 아닌 것 같았어요. 제 책 표지가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렇게 깨끗한 모습으로 반들반들 빛나니 꽤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그 예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복잡해졌어요. 안 그래도 알코올이 잔뜩 뒤흔들어 놓은 정신이 더욱 심하게 요동쳤지요. 어떻게 말해야할까, 그래, 지폐 다발을 넣은 동전교환기 같았어요. 생각이 중구난방으로 막을 수도 없이 빗발쳤거든요. 내가 준 선물을 이렇게 아껴줬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난 또 뭐가 불만인 걸까. 그리 훌륭하지도 않은 책을 때 빼고 광내서 이렇게나 자랑스럽게 전시해줬잖아.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나를 저 책처럼, 그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질 않았어요. 좋게 생각하면 그만일 것 같은데 자꾸 뭔가 찝찝했어요. 분명 어떤 열렬한 마음 없이는 뭔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게 열심히 관리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마음이 그저 달갑게 여겨지질 않았단 말이죠. 그 마음이 뭔지도 모르고 덥석 받아들이기엔 자꾸 뭔가 신경 쓰였어요. 저는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를 알아내야 했어요.

 

하지만 그날, 그 순간엔 그렇게 느끼기만 했을 뿐, 더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그 책을 보고 난 뒤로 어지럼이 점점 심해지더니 마침내는 머리가 지끈대기 시작했거든요. 당장은 아무 생각 말자, 자리에 돌아가기나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벽을 짚고 섰어요. 하지만 상태가 나아지긴커녕 더 심해지기만 하더니, 조금 지나니 뱃속까지 울렁대는 것 같더라고요. 아, 이건 안 되겠다 싶었죠. 찝찝한 기분을 숨기고 건실한 취객으로 돌아갈 자신도 없었고, 혹시 뭐라도 입에 댔다간 화장실로 달려갈 새도 없이 먹은 걸 다 토해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조용히 들어가서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만 먼저 들어가겠다고 속닥대고는 소지품만 대충 챙겨서 비틀비틀 걸어 나왔지요. 다들 거나하게 취해 있던 터라 현관 쪽에 앉아 있던 사람이 사라지는 것까지 눈치채진 못하더라고요. 덕분에 별다른 소란이나 추궁 없이 조용히 자리를 뜰 수 있었어요. 이 경우엔 그쪽 자리에 앉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그 집에서 나와 몇 걸음을 가니 당장에 그 사람이 뛰쳐나와 다가왔어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말이에요. 네, 적어도 한 사람은 제가 사라진 걸 알아챘던 거죠. 평소였다면 고마워했을 거예요. 제 빈자리를 알아준 데에 약간은 감동했을 거고요. 하지만 그날 저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이 행동도 그 '열렬한 마음'에서 나오는 걸까, 그런 끈적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거든요. 제 태도에 그런 생각이 묻어난다면,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게 별것도 아닌 생각이었다면 얼마나 실례겠어요. 그래서 거절하려 했죠. 괜찮다고, 혼자 들어갈 수 있으니 빨리 자리에 돌아가라고 안심도 시켜봤고 집주인 없는 동안 취객들이 엄한 델 뒤지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고 말 같잖은 엄포도 놓아봤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도무지 돌아가려 하지를 않더라고요.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유들유들 핑계를 잘도 대며 꼭 데려다주겠다데요. 친절하게. 결국 그 친절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럼 앞에서 택시 탈 때까지만 부탁한다고 해버렸어요. 인적 없는 새벽길이 불안하긴 한데다가 제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 사람이 다정하게 웃으며 끄덕이던 게 기억나네요. 그러고 택시 정류장까지 짧은 거리를 걸으며 몇 마디 더 나눈 것 같아요.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다는 건 확실해요. 하여간 그게 그날 마지막 기억이에요. 택시를 탔나 싶더니 아침에, 제 침대에서 눈을 떴지요.

 

걱정과 달리 숙취는 별로 심하지 않았어요. 아마 전날엔 심리적 원인 때문에 그렇게 어지러웠었나 봐요. 몸은 그렇게 멀쩡했지만 저는 그냥 누워만 있었어요. 한참 동안 휴대폰도 확인하지 않고 잠이 깬 자세 그대로 천장만 바라봤지요. 블라인드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지금이 몇 시인지, 밤새 연락 온 건 없는지 하는 문제들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게 있었으니까요. 어제 무엇이 그렇게 내 속을 뒤집어 놓았는가, 그 깔끔한 책의 어디가 그렇게 불쾌했는가 하는 문제 말이에요. 전날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파져 왔었는데 말짱한 정신으로 생각해보니 금방 답이 나왔어요.

 

기묘했어요. 책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 그저 소중하게만 여겨지는 책이. 얼핏 책장에 꽂혀있는 듯하지만 사실 전시장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인 그 책이 불쌍했어요. 책장을 펼치고 넘기고 덮는 대신 쓸고 닦고 광을 냈을 그 손. 지면을 방랑하다 마음 가는 곳에 머무는 대신 표지와 제 이름만 핥아댔을 그 눈. 책의 노래가 아니라 물성에 사로잡힌 마음. 하나같이 불쾌했어요. 내가 때로는 즐겁게, 또 괴롭게, 가끔은 여유롭게, 그리고 대개는 피곤함에 절고 마감에 쫓기며 쓰고 다듬었던 그 모든 낱말, 쓰고 나서 뿌듯했던 문장과 마지막까지 머리 싸맸던 행간들이 반짝이는 코팅지 속에서 질식해가고 있는 것 같았어요. 너무 예쁘게, 그저 예쁘기만 하게 말이에요. 그 모든 지면이 다시는 펼쳐지지 않을 거란 사실이 너무 슬펐어요. 매끈하게 빛나는 표지가 제게는 소름 끼치도록 끔찍했어요.

 

그때 맘 같아선 그 사람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정머리 없이 바로 연락을 끊거나 하진 않았어요. 내가 뭘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날따라 다 삐딱하게 보였던 걸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얼마간은 평소처럼 지냈어요. 그러려고 노력했지요. 모임도 계속 나가고 그 사람이 만나자 해도 거절하지 않고, 가끔은 일부러라도 먼저 연락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더는 그 사람 웃음이 곱게 보이질 않더라고요. 그 사람은 변한 데 하나 없이 분명 좋은 사람인데, 그 모든 다정함, 저를 혹하게 한 배려나 친절이 자꾸만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그런 것들이 모두, 그날 그 코팅지를 떠올리게 했거든요. 저를 보호하고 포장하고 또 반짝이게 해주는 배려. 하지만 마침내 저를 펼칠 수 없게 만들 친절. 그렇게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옷에 붙은 테이프 떼어내듯 그 사람 행동을 튕겨내기 시작했어요. ‘테이프 떼어내듯’이란 말이 딱 맞아요. 이 손가락에서 저 손가락으로 옮겨붙기만 할 뿐 좀체 떨어지질 않는 테이프 조각처럼 그 사람도 그 ‘배려’를 쉽게 포기하질 않았거든요. 때로는 좀 강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에요. 자꾸 그렇게 나오니 그나마 남은 정나미도 우수수 다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래저래 핑계 대면서 모임에도 안 나가다가 차츰 연락을 끊었어요. 마지막으로 연락받은 게 아마 한 달 전쯤일걸요? 그게 다예요. 로맨스 끝!

 

이러나저러나 성질 급한 결말 같다고요? 제가 너무했다고요? 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몇 마디 덧붙이자면 꼭 그 일 하나 때문에, 딱 그거 하나가 맘에 걸려서 그 사람한테 틱틱댔던 건 아니에요. 제가 겨우 그런 걸로 그럴 사람이었으면 댁들이랑 여기 앉아 있을 수 있었겠어요? 절교를 해도 진작에 했겠지. 그날 그 책이나 지나친 배려도 싫었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쎄한 지점들이 보여서 그랬던 거예요. 그동안 양식화된 친절이나 의례적인 웃음으로 가려져 있던 것들요. 그런데 그걸 구구절절 여기서 설명하고 싶진 않네요. 별로 재미도 없을 테고 직접 경험하지 않은 입장에선 미묘하게만 들릴걸요? 그래도 듣고 싶어요? 듣고 싶으면 요런 고기 몇 점에 싸구려 술로는 안 돼요. 다음에 출장 갔다 오면서 양주라도 비싼 거로 골라오시든가 하세요.

 

그건 맞아요. 어쩜 그만한 사람 없을지도 모르죠. 다른 사람들이 가진 단점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주 사소하고, 어쩌면 고맙기까지 한 단점일지도 몰라요. 그래요, 그 의견도 겸허히 받아들일게요. 저도 저 좋다고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제 인생에 두 명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하지만 그 사람이 하늘이 제게 준 마지막 인연이었대도 후회는 전혀 없어요. 저는 표지가 반짝이는 책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읽히는 책이 되고 싶으니까요. 꼬질꼬질하게 손때를 타고 책장이 누렇게 들뜨더라도 서가에 꽂혀, 누군가에게 읽히면서 살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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