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토요일이 되면 광화문 입구에서부터 저 멀리 조선일보 사옥까지 펼쳐진 그 넓은 세종대로를 촛불이 가득 메웠다. 온 세상이 떠들썩했고 모두 저마다의 촛불을 들며 분노했지만, 곧 고3이 되는 학생은 토요일 저녁마다 가방을 축 늘어뜨린 채 서울의 지하를 달리고 있었다. 북적이는 광화문 광장은 남의 나라, 거기에서 부대꼈을 수많은 사람의 구호와 외침은 남의 말이었다. 고요하고 풀 죽은 지하철 안이 내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었다.

하루는 역사적 투쟁에 작은 목소리라도 내고자 하는 소심한 시민 의식의 발로가 나를 그 지하철에서 내리게 했다. 유독 추웠던 2017년 1월의 어느 토요일 밤, 나는 무작정 광화문으로 가서 노점상에서 막 구입한 천 원짜리 촛불을 들고 수백만 인파에 섞이었다. 한 손으로는 엘 듯한 얼굴 살갗을 감싸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촛불을 움켜쥐고 있었던 데에는, 나를 비롯한 이곳의 시민들이 여기서 촛불을 들지 않으면 누구도 그 밝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리라는 사명감이 큰 동기가 되어 주었다. 토요일마다 그곳을 찾아온 시민들에 의해 광화문 광장은 촛불로 밝게 빛났고, 그 빛으로 우리는 원하던 목적을 달성했다. 광장으로 나온 촛불의 힘은 과연 강력했다.

대한민국이 촛불의 힘을 실감한 이후, ‘광장 정치’가 성행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촛불 이후의 광장 정치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보여준 절실한 외침이었는지 개인적으로 의문이 든다. 올 하반기부터 전국을 들썩였던 조국 사태를 둘러싼 두 집회를 예로 들고 싶다. 광화문 집회에 이들은 조국 전 장관을 향한 비난이 정치 이념을 떠나, 불공정과 기득권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라 말했다. 그러나 광화문의 빌딩 사이로 울려 퍼진 메아리에는 ‘조국 사퇴’뿐 아니라 ‘문재인 하야’도 섞여 있었다. 특정 정당의 지도부가 연신 시위에 참석하며 행정부를 비난하는 모습은 반대 세력으로 하여금 그 구호에 서린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누구는 서초동에 모였다. 그들은 광화문의 외침에 맞서 ‘조국 수호’, ‘검찰 개혁’의 구호가 담긴 피켓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증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초동에서 그들이 굳이 ‘검찰 개혁’을 외쳐야 할 당위성도 부족했다. 서초동의 집회는 반대를 위한 반대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광화문과 서초동의 시위는 조국 사태의 심각성과 더불어 이를 둘러싼 여론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나뉘었는지 각인한 효과적인 퍼포먼스였다. 기어이 조국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검찰개혁안을 내놓고는 곧 사임했다. 어찌 보면 시민들이 광화문과 서초동에 모였던 목적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광장으로 나온 시민의 힘은 과연 대단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이제 광화문에도 서초동에도 그때처럼 인파가 모이지 않지만, 아직도 같은 구도의 대립은 계속되고 있다. ‘조국’만이 쟁점에서 사라진 채.

광장 정치는 강력하다. 그러나 강력하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마땅히 의회에서 조율하여야 할 정치적 갈등이 자꾸 광장으로 표출되면, 자칫 시민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권력자들은 광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민의를 충분히 반영하는 제도 정치가 자리 잡아 이러한 광장 정치의 필요성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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