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을 맞아 부치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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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을 맞아 부치는 편지
  • 박재균 기자
  • 승인 2019.12.03 2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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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형 - '윤희에게'
(ⓒ(주)리틀빅픽쳐스 제공)
(ⓒ(주)리틀빅픽쳐스 제공)

 

눈이 소복이 내리는 일본 어딘가에서 쥰이 윤희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부칠 자신은 없지만, 요즘 윤희가 나오는 꿈을 자주 꾼다며 그녀의 일상을 소상히 적는다. 쥰을 딸처럼 키워온 그녀의 고모가 편지를 발견해 쥰 몰래 윤희에게 편지를 부친다. 한국에 있는 윤희 앞으로 도착한 편지를 먼저 읽는 것은 윤희의 딸인 새봄이다. 새봄은 부쩍 우울해하고 힘이 없는 엄마가 한 번도 말해준 적 없는 쥰이 누구인지 궁금해한다.

윤희는 외롭고 지쳤다. 고된 일을 마친 후 골목에서 딸 몰래 피우는 담배도 그녀의 고갈을 채우지 못한다. 전남편이 술을 마시고 집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다 영양제를 쥐여주는 것도 불쾌하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는 새봄의 질문에 윤희는 자식 때문에 산다고 대답한다. 새봄은 부모님이 갈라설 때 더 외로워 보이는 엄마와 함께 살겠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마지막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면 엄마가 끝내 무너질까 두렵다. 새봄은 아빠한테 받은 용돈을 착실히 모아, 자신이 대학에 가기 전에 모녀끼리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눈을 보고  싶어 하는 윤희를 위해 눈이 그치지 않는 일본 북해도의 오타루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윤희의 전 애인, 쥰이 사는 곳으로.

그렇게 모녀는 오타루에 왔다. 윤희는 새봄 몰래 쥰의 집 앞에 가보지만, 쥰이 나오자마자 숨어버린다. 새봄은 쥰을 찾아 윤희와 만나게 할 심산으로, 쥰의 집뿐 아니라 쥰의 고모가 운영하는 카페에도 가본다. 눈이 적당히 내리던 여행의 마지막 날, 새봄은 쥰과 윤희에게 모두 같은 장소로 나오라고 해 둘을 만나게 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 둘의 만남은 분명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인데, 카메라는 그냥 하늘을 비춘다. 그리고, 여행이 끝났다.

겨울엔 모든 것이 태어나기 직전이다. 생명이 움트기 전, 춥고 조용한 계절이다. 쥰과 윤희의 편지는 죄책감에 멀리 가지 못해 서로에게 닿을 수 없었다. 새봄의 도움으로 터질 것 같던 마음을 품은 둘이 재회했다. 하지만 둘의 만남이 삶의 새로운 장을 한순간에 꽃피우지는 않았다. 대단한 운명이라며 찬사받거나, 환희로 세상이 뒤덮이지도 않았다. 둘의 만남은 그저, 봄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해주었을 뿐이다. 이제 윤희는 새봄의 대학교 근처로 이사한 집에서 이력서를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쓰고 있다. 새로운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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