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극혐’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혐오’는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인데 거기에다 ‘다할 극(極)’을 더했다. 사전적 의미로는 부정적인 표현의 최고봉이다. ‘맘충’, ‘급식충’, ‘틀딱충’ 등도 마찬가지이다. 특정 대상을 벌레로 비유하는 단어는 바퀴가 번식하듯이 빠르게 번져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쓰는 말이 되었다. 혐오의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성별이나 세대, 계급은 물론 인종, 외모, 거주 지역, 직업까지 차별의 이유가 된다. 우리는 혐오표현이 만연한 혐오공화국에 살고 있다.

예전보다 잘 살기 힘든 시대다. IMF 사태 이후 경제적·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람들의 걱정과 좌절은 일상이 되었다. 사람은 힘들다는 생각에 매몰되면 타인과 세상을 올바르게 보기 어려워진다. 나 하나 챙기기도 바빠서 남의 고통에 공감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공격하여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다. 분노의 표출은 단연 사회적 약자에게로 향한다. 약자는 마치 강자인 것처럼 행동하며 또 다른 약자를 공격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허약함을 감추며 불안감을 해소한다.

혐오표현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한 것은 ‘일베’ 등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주로 노인, 여성, 청소년 등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각종 표현이 끊임없이 생겨났고, 이를 많은 사람이 익명성에 기대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능 프로그램, 유튜브와 인터넷 개인방송이 발달하면서는 일종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웃기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구시대적 사고방식과 별다른 규제가 없다는 점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온라인에 머물렀던 과격한 표현은 이제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열 살짜리 아이가 친구, 선생님, 하다못해 친구의 부모님에게까지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을 쏟아낸다. 혐오표현 문제를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자극에 반복되면 그 자극에 무뎌진다. ‘급식충’이라는 단어도 처음 들으면 다소 충격적이지만 계속해서 들으면 익숙해진다. 사실 지금은 혐오의 의미보다 단순히 청소년층을 설명하는 수식어로 쓰인다. 그러나 본인이 혐오의 의도로 말한 게 아닐지라도 상대방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보장은 없다. 또한, 사람더러 벌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결여된 사회라면 앞으로는 훨씬 더 자극적인 표현이 나올 것이다.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지 않는 사회를 건전한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 모든 과격한 표현을 근절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겠지만, 적어도 문제의식을 느낄 필요는 있다.

언어는 사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언어가 사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윈스턴의 동료 사임은 ‘신어(新語)’ 사전을 만드는 작업에서 불필요한 단어를 없앤다. 예를 들어 ‘good’라는 말이 있으니 ‘bad’는 ‘ungood’로 대체한다. 또 ‘good’를 강조하는 ‘excellent’, ‘splendid’ 등의 말을 없애고, 대신 ‘plusgood’, ‘doubleplusgood’를 사용한다. 그 결과 당의 목적대로 대중의 사고를 철저하게 통제하는 데 성공한다. 비록 소설이지만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혐오표현은 혐오적 사고 양산에 영향을 끼치고 이것이 잘못 표출된다면 혐오범죄가 된다.

그래서 혐오를 혐오한다. 인간은 누구나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 권리가 있다. 그리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도 제한될 수 있다. 그러니 잊지 말자. 누구에게도 타인을 혐오할 자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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