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수 기자)

몇십 년은 지난 듯한 간판의 건물에 들어서면 퀴퀴한 종이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방 안에는 세월의 흐름으로 색이 바랜 책들이 가득하다. 책이 천장에 닿을 만큼 쌓여 있는데도 제목만 대면 마법처럼 찾아주시는 책방 사장님은 어느새 옛날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낸다. 어떤 책을 발견할지 모르는 헌책방은 보물로 가득한 유적지를 떠올리게 한다. 서울 한복판의 대형 창고가 거대한 보물창고로 변신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손이 닿는 높은 서가에서 인생을 바꿀 책을 만날지도 모르는 곳, 바로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이다.

2019년 3월 27일 개관한 서울책보고는 헌책 가치 재고와 시민들의 독서 문화 향유를 위해 지어진 복합문화공간으로, 서울도서관이 운영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헌책의 가치를 알리고, 문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서울특별시가 잠실나루역의 유휴공간을 리모델링해 조성했다. ‘서울책보고’라는 이름은 사전에 진행한 시민 참여 작명 공모를 통해 선발된 것으로, 책이 보물이 되는 공간인 보고(寶庫)라는 의미와 책을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울책보고는 시민들이 책을 찾는 여유를 발견하도록 하는 서울시의 공간재생 프로젝트이자 공공 헌책방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다른 책방, 대형 서점과 차별화된다. 29개의 헌책방으로부터 위탁받은 책들을 한 공간에서 만나볼 수 있다. 현재 약 130,000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으며, 약 170,000권의 누적판매권 수를 자랑한다. 개관 후 주중에는 평균 1,000명, 주말에는 2,000명이 꾸준히 방문해 5개월 동안 약 73,000명이 서울책보고를 방문했다. 서울책보고 관계자는 “처음에는 서울책보고가 잘 운영될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추가 입점을 원하는 헌책방도 늘고 있다”고 밝혔다.

필요한 책을 제목, 장르 등으로 검색해 찾는 기존 도서관의 서가 배치와 달리, 서울책보고의 서가는 헌책방별로 구분되어있다. 서울책보고 홈페이지나 입구 근처에 있는 도서 검색대에서 제목을 검색하면 책을 판매하는 헌책방을 알 수 있고, 해당 헌책방의 서가로 가면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은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불구불하게 선 서가를 돌아다니며 어떤 책이 있는지 살피는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찾을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도서 매입을 하지 않고, 기증도 받지 않는 것은 서울책보고만의 특징이다. 서울책보고 관계자는 도서 매입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작가와 출판사, 서점, 독자가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건강한 출판생태계를 위해서"라 답했다. 최근 이윤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기업형 중고서점을 통한 도서구매 및 판매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반면, 헌책방을 포함한 생계형 중고서점의 수는 줄어드는 추세이다. 도서 산업의 균형을 위해 서울책보고는 출판사, 서점 및 작가가 배제된 독자들 간의 거래 및 유통을 지양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일반 기증은 받지 않지만 명사로부터 전시 및 열람을 목적으로 도서를 기증받는다는 점이 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한상진 명예교수, 한양대학교 심영희 교수의 도서 10,600권을 기증받아 전시 중이다.

 

문학으로 채우는 일상

서울책보고는 찾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행사를 준비해 책방뿐 아니라 문화 공간으로도 역할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서울도서관이 선정한 2,200여 권의 독립출판물을 소개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11월 23일, 24일에는 독립출판작가들의 작품과 다양한 주제로 선정된 출판물을 감상할 수 있는 <독립출판물 보고> 독립출판마켓이 진행된다. 행사에는 8명 작가의 작품 전시 외에도 독립출판작가로부터 출판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릴레이 토크, 버스킹 공연, 판매 부스 등이 준비되어 있다.

시대에 따른 문학 작품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행사도 준비되어 있다. 6월 25일부터 상시 운영되는 전시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읽기의 역사>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별 대한민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책과 잡지를 열람하며 문학사의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다. 청년 문화, 노동자의 삶 등을 키워드로 한 1970년대 서가에는 조세희의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잡지 <씨알의소리>가 전시되어 있으며 출판 운동,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을 키워드로 한 1980년대 서가에는 강석경의 소설 <숲속의 방>, 김홍신의 소설 <인간시장>을 찾아볼 수 있다.

10월 22일부터 12월 1일까지 박경리, 오정희, 박완서, 한강, 김애란, 박민정 등 여성 작가들의 대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근현대 여성 작가전>이 진행된다. 전시를 통해 한국 최초 여성 근대 소설가 김명순부터 현대 한국 여성 소설가를 대표하는 소설가 최은영까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며 그들의 발자취를 살피고 미래를 전망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매월 첫째, 셋째 수요일에는 <수요 북클럽>이라는 이름의 독서 소모임이 진행된다. 오전, 오후 팀으로 나뉘어 두 시간 동안 지정된 책을 읽은 후 감상 및 생각을 나눈다. 독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신청할 수 있기 때문에 매 회차 대기자가 있을 정도로 활발한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책방의 역사를 이어나가다

서울책보고에 도서를 위탁하고 있는 29곳의 헌책방 중 10곳이 청계천 헌책방거리의 책방들이다. 서울 청계 5가와 6가 사이에 자리한 청계천 헌책방거리는 17개의 헌책방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은 을지로 일대 청계천 변에 자리 잡고 인근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중고 군복에 검은 물을 들인 작업복을 만들어 팔았다. 사업이 확장되자 청계천 변을 중심으로 노점상들이 모여들었고, 현재 동대문 시장으로 발전한 거대 상권을 형성했다. 근처에 당시 지성의 집합체로 여겨졌던 대학로가 위치했기 때문에, 헌책방들도 상권에 뛰어들었다. 점차 헌책방이 많이 들어서자 이들은 1962년 평화시장의 1층으로 터전을 옮겼고, 이후 30년간 전성기를 누리며 시민들의 지적 갈증을 채워주었다. 서울특별시에 의해 서울 미래 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인터넷의 발달 및 대형서점의 출현으로 지금 헌책방거리에는 17곳의 책방만이 남아있다. 기독성문서점 현만수 사장은 “책방의 주요 고객층이 50대 이상”이라며, “지금 어린 학생들은 이런 헌책방거리가 있는 줄도 모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위기를 맞이한 것은 청계천 헌책방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014년 헌책방 경영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서울·경기를 중심으로 모인 30개의 헌책방이 전국책방협동조합을 설립했다. 협동조합은 문학,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주로 모으는 책방, 초판본이나 절판된 책 위주로 모으는 책방 등 다양한 매력의 헌책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협동조합은 헌책방 운영자들과의 교류를 목적으로 각 헌책방의 책을 보관하는 물류창고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서울책보고는 도서 위탁 판매를 통해 청계천 헌책방거리와 협동조합에 경제적인 도움을 제공해왔다. 하지만 서울책보고의 규모만을 확장할 경우 헌책방이 서울책보고에 더 의존하게 되므로, 헌책방들이 자생력을 길러 특색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와 더불어, 이정수 서울도서관장은 “헌책 대신 독립출판 서적이나 지역 잡지 등 헌책방과 시민의 매개체로서 ‘책보고’의 다른 역할도 찾아보겠다”고 밝혔다.

서울책보고 관계자는 헌책의 매력은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절판된 책을 구할 수 있다는 데 있다며, “유휴공간을 새로운 책 문화공간으로 재생시킨 서울책보고의 의미도 이와 같다”고 전했다. 이어 서울책보고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헌책을 찾으며 지나간 시간과 추억을 되찾아 떠올리는, 기억의 재생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헌책은 버려진 책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동시에 이미 누군가에게 선택되었던 책이기 때문에 보장된 가치를 지닌다. 새로운 주인을 만날 수 있는 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책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의 손때로 표지는 너덜너덜해졌지만, 그 안에 담긴 글은 늙지 않는다.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저마다의 시간을 끌어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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