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 '잉크 피딩-곽희와의 대화', 2015, 아크릴, 종이, 물, 잉크, 비디오, 가변크기

동양화가 주는 느낌을 한번 상상해보자. 어딘가 고고한 곳에서 자연과 하나가 된 채 일필휘지로 그려내는 자연 친화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뭔가를 그려내어 화폭에 담아내는 순간의 폭력성과 위계에 집중한다면, 더 이상 동양화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 억압의 과정을 진중하게 포착한 동양 작가들이 모여 <산수-억압된 자연> 전시를 열었다. 동양화에 비판적인 동양화를 마주하러 대전 이응노 미술관으로 떠나보자.

 

시각과 폭력성

르네상스 시기에 비약적으로 발달한 원근법은 당시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내는 주체인 인간을 상정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 전의 많은 그림이 신성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그려졌다면, 르네상스의 그림들은 피사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화가의 존재 또한 피력했다. 동양화는 르네상스보다도 먼저 풍경을 그려내는 것에 있어 더 다원적이고, 더 심층적인 원근법을 개발했다. 선조들의 자연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도교의 선(仙)에 대한 경외가 산수화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높은 수준의 원근법은 어쩌면 자연에 대한 존경보다는 자연과 사람을 분리하고, 자연을 해체·조립할 수 있다는 오만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철제 도구로 줄기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자란 기묘한 모양의 나무들을 볼 수 있다. 션샤오민의 연작, <분재>이다. 분재는 작은 화분에 나무를 기르면서, 작은 크기를 유지하며 나무의 모습을 재현하는 동양의 전통예술이다. 당연히 전통적인 분재의 결과물은 철제 구조물이 연결된 섬뜩한 모습은 아니지만, 나무의 크기를 작게 하기 위해 수많은 인공적인 변형이 요구된다. 아담한 크기로 자란 나무는 집의 경관을 아름답게 하나, 이를 위해 잔인한 변형과 수술이 필요하다. <분재>는 잔인하고 때로는 오만한 인간의 정복욕을 폭로한다. 그리고 그 원인에는 자연이 시각적으로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비대해진 자의식이 있다.

쉬빙의 <백 그라운드 스토리: 루산>은 루산을 그린 전통 산수화를 LED로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하지만 전시장의 화살표를 따라 걸으면 자연스레 작품의 후면으로 가게 된다. 관객은 작품의 뒷면이 낚싯대나 비닐, 신문지 등의 잡동사니로 난잡하게 이뤄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작품은 산수화의 미학에 아주 직접적인 조소를 가하고 있다. 시선은 세상을 등분한다. 자기가 보는 정면의 세상이 생김과 동시에, 자신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후면의 세상이 남겨지게 된다. 쉬빙은 그의 작품에서 후면의 세상을 무시한 채 정면의 세상만을 담아내는 산수화의 아름다움을 폭로한다. 또한, 산수화가 보여주는 면만이 아름다움이라 주장하는 교조적인 미학을 비판한다.

 

추상으로 산수화를 해체하다

관객은 이내 잉크가 아무렇게나 칠해진 수많은 한지가 나풀거리는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 앞에 있는 TV에서는 작업 과정이 나오고 있다. <잉크 피딩-곽희와의 대화>를 작업한 장위는 수많은 한지를 쌓아놓고, 잉크를 스며들게 해 자연적으로 잉크가 스며든 한지들을 입체적으로 전시했다. 곽희는 북송의 화가로, 그의 저서 <임천고지>에서 고원·심원·평원, 세 개의 시점으로 자연을 재현하는 삼원법을 제시했다. 장위는 곽희의 삼원법을 비판적으로 해체한다. 그는 2차원의 평면에 세 개의 시점을 담으려 했던 산수화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의 시점을 상징하는 수많은 한지를 기하학적으로 배치하여 삼원법을 너무나도 쉽게 달성했다. 관객의 위치에 따라 변하는 수화가 주는 느낌은 어딘가 모욕적이다. 산수

화의 철학을 임의적인 물성으로 치환시켜 버리며, 그 권위를 격하시키는 느낌이 든다.
장재록의 <Another Act>에서는 그러한 권위 끌어내리기가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Another Act>는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산수화지만, 컴퓨터에서 픽셀마다 점을 찍어 만든 그림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린 것이 산수나 풍경보다는, 임의의 이미지에 더 가까워 보인다. 픽셀은 무차별적이고 임의적이다. 어떤 픽셀보다 위에 있는 픽셀은 그 아래에 있는 픽셀과 어떠한 차이도 없는 정보일 뿐이다. 사방의 픽셀도 어느 하나를 특정하지 못하며, 그 부분 부분이 모여야 비로소 관객은 그 전체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픽셀에 담아낸 산수화는 삼원법으로 대표되는 그 철학이 거세되어 있다. 

<산수–억압된 자연>은 동양화가 늘 자연과의 조화를 담는다는 시각을 비판하고, 옥시덴탈리즘을 경계했다는 점에서 분명 색다르다. 또한, 시선 자체의 폭력성이나 해체주의 등을 주장한 프랑스 철학사조와 동양화의 접점이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까운 이응노 미술관에서, 철학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생각들을 만나보자. 

 

장소 | 이응노 미술관
기간 | 2019.10.15.~ 2019.12.22.
요금 | 500원
시간 | 10:00 ~ 18:00
문의 | 042)611-9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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