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체능 계열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특수목적 고등학교에는 크게 과학고등학교(이하 과학고), 외국어고등학교(이하 외고)와 국제고등학교(이하 국제고)의 세 종류가 있다. 여기에 영재교육진흥법에 의해 설립되어 위 세 부류의 학교와는 결을 달리 하지만, 사실상 같은 부류로 취급되는 과학영재학교(이하 영재교)까지 한데 묶어 보통 ‘특목고’로 지칭하곤 한다.

이 중 외고 및 국제고는 폐지론이 계속해서 가열되고 있으며, 현 정권과 서울시교육청의 정책 방향 또한 폐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된 이유는 이들 학교가 더이상 당초의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의 해외 진출이 제한되어 조기에 외국어를 습득할 교육기관이 절실했던 80년대에 반해, 요즈음 서울의 학군 좋은 동네에서는 한 반에 예닐곱 명씩 해외 거주 경험이 있으며 그들의 외국어 구사 능력은 외고에 진학하지 않더라도 이미 원어민에 뒤처지지 않는다. 외고는 문과 계열 상위권 학생들의 명문 대학 진학을 위한 경유지로 전락했고, 그 교육과정도 더 이상 효용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외고의 폐지에 충분히 수긍이 간다. 이 문제의 이해당사자인 학생의 입장을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본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과학고와 영재학교의 존속 여부는 어떻게 되는가? 대부분의 학우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이 두 학교는 빠른 시일 내에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과학기술 인재 양성은 정권을 불문하고 적극 추진하는 국가적 과업이므로 이 두 학교에 대한 폐지론은 섣불리 제기하기 힘든가 보다. 하지만 과연 과학고와 영재교를 모두 유지하는 것이 과연 이공계 학생들이나 국가에 도움이 되는 선택일까? 서로 성격이 비슷한 과학고와 영재교를 둘 다 설치한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고 출신으로서 내 생각을 말하자면, 과학고를 다른 특목고와 함께 폐지하고 대신 영재학교에 지원을 집중하여야 한다. 과학고의 교육은 비생산적이므로, 외고와 마찬가지로 그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OO과학고등학교의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기간. 화요일 2교시 과목은 생명과학실험이다. 떨리는 손으로 시험지를 받아 든다. 객관식 21문항의 문제와 선택지는 하나 같이 똑같다. 

1. 다음 제시된 <보기> 중 옳은 것의 개수는? ① 2개 ② 3개 ③ 4개 ④ 5개 ⑤ 6개

많은 시험의 객관식 한 문항이 사실상 수능 2점 수준의 문제 5개에 해당하며, 이 문제들을 50분 내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을 만한 숫자로 존재한다. 이러한 유형의 문제는 단시간에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 관건이므로 학원의 도움이 성적에 크게 영향을 미치며, 학교에서의 수업은 시험 범위를 확인하는 용도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고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은,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과학고의 태생적 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과학고는 교육부에 소속되어 있고, 교사들도 일반 중고등학교 교사의 임용 과정을 거쳐 발령받은 분들이기 때문에 고등학교 수준의 과정 이상을 가르쳐본 경험이 많지 않다. 따라서 과학고의 교육 과정은 끽 해야 고등학교 과학Ⅱ 과목의 연장선을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학생들은 학년별로 선생님이 바뀌면서 같은 내용을 귀가 따갑도록 계속 배워야 하고, 2년, 길면 3년간 이들 과목을 거의 통달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내신으로 변별을 하려면 이렇듯 불필요한 자원 낭비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당연하게도 우수 이공계 인재 양성을 위한 과학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과학고의 교육에는 적어도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차별되는 무언가가 있어서, 설령 학생들이 학원에 의존하더라도 그 영향이 절대적이지 않고, 오히려 학원의 교육이 학교의 교육을 따라잡는 구도가 되어야 마땅하다. 교실에서 충분한 배움을 얻지 못한 학생들이 민간 시설인 학원에 의존하고, 오히려 학원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주객전도의 현실은 과학고의 교육 체계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말해준다. 우수한 인재들을 모아 놓고도 1학년 때 가르쳤던 내용을 2학년 때 가르치고 3학년 때 또 가르치면서, 그들을 비겁한 방법으로 줄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 과학고의 현실이다.

반면, 영재교육진흥법에 의해 설립된 영재교는 이러한 과학고의 폐해를 타파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교사 중에는 각 분야에서 석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분이 있고, 개설된 교과목 또한 고등학교 교육과정과는 결을 달리 한다. 또한 학생 스스로 시간표를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기에 불필요한 과목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쏟을 필요없이 각자의 세부 전공에 집중할 수 있다. 영재교 학생들이 학원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대학 전공 수준의 차별화된 교육이 제공되기 때문에 학원은 이를 따라잡는 보조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과학고 학생들이 같은 미적분Ⅱ 유인물을 10번씩 풀 동안, 영재교 학생들은 선형대수학을 배운다. 과학고의 교육은 생산성이 없지만 영재교의 교육은 생산성이 있다.

그러면 이렇듯 피 말리는 과학고의 내신 경쟁이 학생들의 학업에 도움을 주는가? 카이스트의 영재교 출신 학생들과 과학고 출신 학생들을 비교하여 보자. 우리 학교에 입학한 과학고 졸업생들은 AP제도를 통한 기이수 학점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고, 이미 2번 정도 배웠을 과학 과목을 1년 동안 다시 수강하게 된다. 또 여기에 치여 정작 전공 공부에 필수적인 기초 수학 과목들을 1학년 때 다 끝마치지 못하고 1, 2학년 때 나누어 듣게 된다. 이렇듯 과학고 졸업생들이 기초 과목에 낭비하는 에너지는 학업적 연속성을 확보하는 데 큰 장애가 되며, 이는 자칫 많은 과학고 출신 학생들이 학업에 지루함을 느끼고 잠시나마 공부를 소홀히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반면 영재교 출신 학생들은 심화된 교과목을 수강하며 고등학교 때 기초 과목의 지식을 습득하고, AP 제도를 통해 이를 기이수 학점으로 인정받는다. 이들은 1학년 때부터 전공 과목을 들으며 미리 여러 전공 과목을 수강하며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아갈 뿐 아니라, 전공 지식을 일찍부터 습득함으로써 개별연구나 URP 등의 연구활동도 더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다. 졸업에 필요한 수강 학점도 줄어드므로 교환학생, 복수전공 등의 학업적 다양성도 졸업 연한에 대한 걱정없이 더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 이러한 혜택 덕에 영재교 졸업생들은 진로를 설계하는 데 더 수월한 입장에 놓이고, 이들의 학업적, 대외적 성취가 과학고 학생들에 비해 더 우수하게 됨은 당연한 이치다. 실제로 2017년 8월 우리 학교가 언론을 통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과학자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았거나 학부생으로서 국제 학술지에 이름을 올리는 등 최고의 성과를 낸 학생들은 대부분 영재교 출신이었다. 물론 이들이 영재라서 영재성을 발휘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과학고,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 학생들 중에도 충분히 우수한 학생은 많다. 조금씩 벌어지는 환경의 차이가 큰 성과를 만드는 데 한몫 한 것이다.

과학고는 불필요한 내신 경쟁을 부추겨 학생들을 줄 세우는 데 급급하고, 이러한 환경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이 영재교 출신 학생들에 비해 크게 두각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므로, 과학고의 교육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이미 과학고는 영재교를 제외하고도 20개씩이나 있어 더 이상 우수한 인재를 모았다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지경이다. 영재교와 이공계 인재 육성이라는 똑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으면서도 교육 시스템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과학고가, 외고랑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이 문제의 이해당사자인 학생의 입장을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본다면 말이다.

이러한 교육의 폐해는 그 주체인 국가에 온전히 돌아온다. 과학고 학생들 또한 빠른 문제풀이를 요하는 반복 위주의 교육 체계에 갇혀 창의적인 사고를 펼칠 자유를 제한 받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과학고를 특목고 폐지 기류에 포함시키고, 남는 예산과 노력을 영재교에 집중함으로써 진정한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실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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