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다움에 대한 철학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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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다움에 대한 철학의 답변
  • 박재균 기자
  • 승인 2019.10.08 1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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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 - '피해자다움은 무엇인가'

성범죄를 둘러싼 많은 법적 논쟁이 화두가 되고 있다. 범죄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과는 달리, 이따금 성범죄에 한해 고소인은 자신의 ‘피해자다움’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피해자다움은 사람의 조리와 상황의 맥락으로 판단 내릴 수 있는 주관적인 영역인 것만 같다. ‘피해자다움’이 성범죄 관련 재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현재의 관례에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더불어 관련된 법의 정당성을 밝히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 철학자가 이 주제에 뛰어들어, 독창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피해자다움은 사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모든 법적 분쟁에서 유효할 수 있는 개념이다. 작가는 ‘시점 t 이후 A의 행위 S는 범죄 C에 대해서 피해자답다’를 ‘[A가 C의 피해자이다]라는 가설 하에서 A의 행위 S는 [A가 C의 피해자가 아니다] 라는 가설하에서보다 더 잘 설명되고 이해된다’로 정의한다. 피해자다움은 사건 후부터 정의된다. 이 정의로 인해 성범죄에서 가해자 측 변호인이 논거로 사용하곤 하는 ‘밤늦은 시간에 위험한 곳을 다니고 있었다’나, ‘야한 옷을 입고 있었다’ 등은 피해자다움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이 정의는 여전히 피해자다움을 완벽히 상술해주지 않는다. ‘어떤 가설하에서 다른 가설하에서보다 더 잘 설명되고 이해된다’ 에서 더 잘 설명되고 이해된다는 대목은 “결국 인간의 행위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유서 깊은 질문으로 논리를 이끈다.

작가는 인간 행위의 설명적 이해에 관한 두 이론을 언급하며, 특히 드레이의 행위 설명 이론에 집중한다. 인간 행위의 당위성을 논리적 인과관계로 파악하며 개인성을 제거하는 대신, 행위가 행위자의 주관적 관점에서 적절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곧 행위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원치욱은 이 이론을 계승하며, 타인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너의 행위를 이해하는 방식은 너를 너의 행위로 이끌었던 실천 추론을 재구성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저자는 이러한 심적 시뮬레이션 모델이 피해자다움을 정립하기 위한 첫 단계로 보았다. 하지만 심적 시뮬레이션 모델은 여전히 상식심리학이 가지는 모호함과 단서조항의 무수함을 안고 있기에 법에서 사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저자는 법칙 인과적 모델과 심적 시뮬레이션 모델을 병합한 원치욱의 모델을 상술한다. 간단히 말해, 행위자의 심리상태가 사실성, 인과성, 그리고 합리성을 지닐 때 비로소 설명이 완료되었다는 모델이다. 이를 통해 저자가 한 작업은 피해자다움을 정의할 때, ‘더 잘 설명되고 이해한다’라는 대목을 자의적이지 않고, 정형화된 이론적 토대에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는 법에서의 안정성을 위해, 철학적인 견지로 인간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학문적 견해를 내놓는다. 고루하고 형이상학적으로만 느껴지는 철학의 화려한 변용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정말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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