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역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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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역사를 찾아서
  • 민홍일 기자
  • 승인 2011.06.2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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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하면서도 쉬운 취미생활 중 하나로 꼽힌다. 최근 2D영화와는 색다른 재미를 주는 3D영화, 4D영화까지 등장하면서 영화는 우리 생활에선 빠져선 안될 하나의 여가로 점점 자리잡아가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를 수입해 상영하던 극장에서 최신 시설을 갖춘 멀티플렉스까지의 변천사를 우리 나라의 역사와 함께 살펴보자

 

1900년부터 시작된 영화 문화

우리나라의 극장 문화는 최초의 영화상영관인 단성사가 1907년에 개관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극장이란 영화나 연극뿐만 아니라 여러 연주회나 씨름 같은 운동경기도 열리는 복합 문화 공간이었다.

1910년대 후반에 지금의 영화 애호가에 해당하는 ‘애활가’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조선에서 대중오락 중의 하나로 떠올랐다. 애활가들은 주로 할리우드 영화에 열광했고 영화의 인기가 계속될수록 극장의 분리도 진행되었다. 남촌의 일본인 극장에서 일본어 해설을 듣던 조선인 관객들은 조선어로 해설하는 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으로 옮겨 갔다. 이 무렵 할리우드 영화는 길이가 길어졌고 내용도 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해 언어별 극장의 분리를 가속했다.

언어별로 영화관이 나뉘게 되면서 일본인 관객은 남촌의 극장으로, 조선인 관객은 북촌의 극장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극장은 대중들에게 언어적, 민족적, 문화적으로 단일하고 균질적인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식민지치하에서 극장은 정치적 성격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극장

식민지치하에서 극장은 독립운동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조선인 극장에서는 빈번히 관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격문이 걸렸다. 3.1 독립만세운동 때 일본군의 무력 동원으로 길거리 시위가 힘들어지자, 같은 해 3월 21일 단성사와 우미관의 관객들은 영화상영 도중에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1929년 12월 13일 조선극장에서는 조선일보 서무서기 김무삼이 무대 위로 올라가 광주학생사건에 대해 낭독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에도 극장에서의 독립운동이 빈번히 일어나자 총독부는 수시로 극장 영업을 중단시켰다.

일제식민지 말기에는 조선 영화가 일본 영화사와 합작하는 대가로 일본에 배급권을 넘겼다. 그 이후 진보된 극장과 신식 대형 극장이 생기기 시작하고 일본의 영화사들이 자기 영화를 직영함으로써 조선 영화관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 일본은 조선 전체뿐만 아니라 만주의 영화계까지 장악하였고, 영화의 제작 및 배급을 제한하는 조선영화령이 공포된 이후에는 일제의 지휘 아래 영화관 수가 전국적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해방과 한국 영화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극장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해방 이후 민 군정 실시와 한국전쟁은 영화산업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기술적인 문제와 자본의 부족으로 한국 영화 제작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대부분 흥행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였고 무대 공연예술과 영화를 함께 갖추고 있던 당시 극장은 창극, 여성국극, 특히 굿판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굿’의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특징은 극장에 많은 사람을 끌어모음으로써 한국 영화가 발전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 영화 전성기를 맞다

1960년대는 한국 영화와 극장의 전성기였다. 1962년에는 34.8%의 관객 수 상승률을 보이는 등 영화는 가장 선호하는 오락,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70년대 전후로 영화관객 수는 감소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텔레비전이 보급되고, 보편화된 영화성향에 비해 시민이 선호하는 오락성향이 다양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엄격한 영화정책이 영화의 수준을 낮춰 영화산업의 침체를 가속화했다. 영화침체가 계속되던 1970년대 후반에는 자극적인 내용을 담은 호스티스물과 같은 장르를 만들어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고교물의 흥행은 많은 청소년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많은 소극장의 등장

1980년대에는 1970년대 후반 젊은 층의 뜨거운 열기를 이어갔다. 이 시기부터는 학력이나 경제력에 따라 선호하는 영화가 달라졌는데, 크게 개봉관을 주로 이용하는 관객과 재개봉관이나 하번관을 이용하던 관객으로 나뉘었다. 개봉관을 주로 이용하는 관객층은 대부분 학력과 경제수준이 높았다.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성장해 미국 문화에 익숙한 젊은 사람들도 많았다. 반면 하위계층은 주로 농촌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며 학력과 경제 수준이 낮았고 미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져 한국영화를 선호했다.

1980년도에는 영화정책의 개정으로 소극장이 허용되어 한국 영화산업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극장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소극장 문화가 한국 영화 문화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많은 소극장이 개봉관들의 수요를 채워주었고 한층 더 다양해진 관객들의 성향을 만족함으로써 복합상영관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다양한 복합상영관의 탄생

1990년을 기점으로 소극장 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소극장들은 값싼 가격이 가장 큰 장점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시설이 낡고 자본력이 부족한 경영자들은 극장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소극장이 몰락했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 성공한 소극장들은 상영관을 확장시켜 복합상영관을 탄생시켰다. 상업자들도 경영이 불안한 기존 대형극장 대신 소극장과 중형극장을 섞은 복합상영관에 관심을 보였다. 복합상영관은 한 공간에서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충분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한국 영화를 작은 극장에 배정하여 한국 영화의 부진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또한, 몇몇 복합상영관들은 식당이나 쇼핑센터 등을 한 건물에 배치함으로써 지금의 멀티플렉스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멀티플렉스의 등장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영화 상영관, 쇼핑센터, 식당 등을 한 건물 내에 갖춘 멀티플렉스가 등장했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은 한국 영화산업을 부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화 상영시간을 놓친 관객들은 멀티플렉스에서 대기 시간 동안 다른 여가를 즐길 수도 있다. 또한, 멀티플렉스는 흥행하는 영화에 많은 스크린을 할당해도 다른 영화들에 스크린을 줄 여유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취향의 관객들을 수용할 수 있다. 극장은 음침하다는 기존의 편견을 깨버리면서 가족단위의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멀티플렉스는 관객들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영화산업을 부흥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최근 스마트폰의 보급과 입체감을 느낄 수 있는 3D영화의 등장으로 영화의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우리나라의 극장 문화는 최초의 영화상영관인 단성사부터 멀티플렉스까지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식민지치하에서 일본의 극장 통제와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는 극장 문화와 영화산업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영화는 우리에게 한결 더 가까이 다가왔고 최근 스마트폰의 보급과 입체감을 느낄 수 있는 3D영화, 진동, 바람, 향기 등의 효과를 영화에 집어넣어 현실감을 준 4D영화까지 등장하면서 영화는 필수생활 중 하나로 굳어져 가고 있다. 피곤하거나 지루할 때 영화 한번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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