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빵보다는 밥을 좋아한다. 내가 어릴 때부터 밥과 국, 반찬으로 이루어진 밥을 계속 먹어왔고 아직까지도 서브웨이나 롯데리아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이다. 아마 오랜 세월 유지해온 식습관이 반영되어 나온 결과인 것 같다.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로 빵으로 한 끼를 때우고 다음 식사에 밥을 먹지 않는다면 아마 속 쓰려서 못 먹겠다.”라며 투정을 부릴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 집은 가끔 어머니가 퇴근하시면서 사 오는 빵을 제외하면 집에서 빵을 먹을 일이 없었다. 항상 생글생글 웃던 사람이 그날따라 유난히 기분이 더 좋아 사 오는 빵이었겠지만 잘 먹지도 않고 식탁 위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뒤늦게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버리기 일쑤였다.

대학을 다니던 나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솔직히 그전까지 우리 집은 형편이 좋았고 좋은 학원, 학교에 다니며 좋은 성적을 받아 이곳에 왔기 때문에 나는 살면서 큰 고생을 하지 않고 자라난 아이였다. 그렇지만 KAIST는 나 같이 애매하게 잘하던 학생과는 다른, 소위 말하는 괴물들이 즐비해 있는 학교였고 때마침 가세가 기울어진 나는 바쁜 시간을 쪼개며 생계도 유지해야 했다. 바깥에서 일하며 볼꼴, 못 볼 꼴 다 보던 나는 점점 지쳐갔고 떨어지는 학점을 보며 더욱 피폐해져 갔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추석이랍시고 본가에 내려가던 늦은 밤, 내 눈에는 집 앞에 있던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프렌차이즈 빵집이라곤 하지만 기숙사 2개 정도 합쳐 놓은 크기에 그마저도 늦은 시간이라 인기 없는 빵들뿐이었다. 그래도 나름 오랫동안 있던 빵집인지라 가끔 어머니가 사 오시던 빵의 출처는 이곳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빵이 먹고 싶었는지, 아니면 명절인데도 든 것 없는 손이 집에 들어가기 적적해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내 양손에는 3만 원어치의 빵이 가득 들려져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식탁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많을 때도 안 먹어 버리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양손 가득 빵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부터 마음속에서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서자 동생이 반기면서 갑자기 웬 빵이냐고 물을 때도, 식탁에 앉아 말없이 동생과 빵을 먹을 때까지도 그 기분은 가시지 않고 점점 커져 갔고, 식탁 위에 놓여있는 사진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가 편안한 삶을 살아오셨다고 생각해왔다. 부유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라 오십이 되어가는 나이까지 꽤 좋은 직장에서 근무하셨고 항상 미소를 내리지 않는 어머니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남에게 미움받아 고생한 적은 없을 사람이었으랴. 가끔 집안일이 너무 서툴러 나와 동생이 도맡아 할 때도 그만큼 당신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고생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뜻이니까 나는 괜찮았다. 가끔 아무도 안 먹을 빵을 사 오는 것도 아깝다기보다는 오늘 어머니가 기분이 유난히 더 좋아 사 오는 거라고 생각했기에 빵을 사오길 기다려지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옛날 당신이 사 오던 빵은 그날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사 오는 것이 아님을 이제 알고 있다. 당신이 직장 상사로부터 들었을 모욕적인 말들, 어쩌면 그날 내가 무릎을 꿇고 빌었던 것처럼 당신도 무릎을 꿇고 빌었을 수도 있을 하루를 올라간 입꼬리만으로는 감추기 버거워 아등바등 덮어보던 손이었음을. 이제 더 이상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미소를 보여주던 따뜻한 사람도, 비바람을 막아주던 튼튼한 지붕 같던 사람도 아니다. 나이에 맞게 처진 어깨에 늘어난 주름, 작은 체구에 하얀 가닥이 보이는 머리카락까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당신이 떠나간 후에, 당신이 사 오던 빵 쪼가리 하나로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늙어 처진 어깨였겠지만 우리에게는 대양보다 넓었고, 늘어난 주름에 하얀 가닥이 보이는 머리카락이었겠지만 그 어떤 노장보다 기품이 있어 보였음을. 나의 여전사여. 화려하지 않은 삶이었겠지만 저에게는 누구보다 찬란했던 당신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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