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키에 짧고 굵은 다리를 가진 어린아이가 무대 한가운데 섰다. 분명 무용수로서 이상적인 체형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이내 모두를 사로잡았다. 그는 원하는 만큼 공중에 머무를 수 있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힘차게 무대를 가로질렀다. 바츨라프 니진스키, 러시아의 한 무용수가 발레 예술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춤의 축복을 받은 아이

니진스키는 1889년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무용수 집안에서 자란 그에게 춤은 호흡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언제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니진스키는 자신이 기억하는 한 자기는 항상 춤을 추고 있었다고 답했다. 그의 부모 모두 바르샤바에서 무용수로 활동했으며, 특히 아버지 토마스는 도약하는 동안 공중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인 발롱에 재능을 보여 러시아 세토프 오페라 엔터프라이즈의 제1 무용수이자 발레 마스터로 활동했다. 니진스키도 이에 영향을 받아 도약에 뛰어났는데, 동생 브로니슬라바는 니진스키가 전혀 힘들이지 않고 공중을 넘나들었다고 언급했다.
10살이 되던 해 니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실 발레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자연스럽고 가벼운 춤은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다. 머지않아 그의 이름이 러시아에 퍼져 나갔고 열두 살에 이미 ‘세계의 8대 불가사의’라는 칭호를 얻으며 블라디보스토크의 마린스키 극단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다. 졸업 후 마린스키 무대에 선 그는 <파키타>, <아르미드 관> 등에 출연하며 입단한 지 일 년 만에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악몽으로 남은 완벽한 파트너

1907년 니진스키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라는 공연 기획자를 만나게 된다. 디아길레프는 러시아 회화, 음악, 무용 등을 20세기의 서구에 소개해 유럽 예술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을 받고 있다.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단 ‘발레 뤼스’에 합류해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무대에 섰다. <세헤라자데>, <지젤> 등에서 맡은 배역을 완벽히 소화해낸 그는, <페트루슈카>에서 발레리나를 사랑한 죄로 죽임을 당하는 인형 페트루슈카를 연기해 ‘무용의 신’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디아길레프는 극단주이자 니진스키의 후원자로서 물심양면으로 젊은 무용수를 후원했고, 이내 그의 연인이 된다. 둘은 환상적인 파트너가 되어 가는 곳마다 관객들의 찬사를 불러왔다. 하지만 니진스키는 일기에 둘의 첫 만남에서부터 디아길레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지만, 엄마와 형제를 부양하기 위해 그의 동거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연이은 성공에 힘입은 무용의 신은 스스로 안무를 창작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그가 안무한 <목신의 오후>가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며 안무가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나, 니진스키의 독립을 탐탁치 않아 했던 디아길레프와 갈등이 생긴다. 그러던 중, 니진스키는 1913년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발레 <봄의 제전>의 안무를 맡게 된다. 그는 기존의 화성 체계와 리듬에서 벗어난 곡에 맞추어 거친 폭력과 외설적인 요소를 더한 춤을 무용수들에게 요구했다. 전통적인 발레와는 다른 공연에 관객들은 항의했고, 후속 공연 일정을 취소하라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봄의 제전>의 실패는 발레 뤼스의 위기로 다가왔고, 발레 마스터를 포함한 일부 단원들이 발레단을 떠나자 디아길레프는 고민에 빠졌다. 둘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던 가운데, 때마침 남미 순회공연에 디아길레프가 동행하지 않게 되면서 니진스키는 발레 뤼스에 입단한 이래 처음으로 디아길레프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는 후원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열성적인 팬이었던 로몰라 풀츠키와의 결혼을 발표한다. 전보를 통해 니진스키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디아길레프는 분노하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니진스키가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도록 막았다. 이후 니진스키는 런던에서 자신의 발레단 ‘세종 니진스키’를 창설했으나 16일 만에 망하고 만다. 그의 전부였던 춤을 추지 못하게 되자, 니진스키는 결국 정신적으로 무너진다.

프로이트 등 저명한 정신의학자에게 진료를 받았지만, 정신 질환은 악화되어만 갔다. 그는 피로 얼룩진 시체 안치소의 커버, 그의 얼굴을 한 나비, 디아길레프의 얼굴을 한 거대한 거미 등을 그리곤 했다. 1919년 1월 19일, 여러 병원을 전전하던 그는 쉬브레타 하우스의 초청 공연 무대에 올랐다. 연습복을 입고 무대에 선 니진스키는 관중에게 인간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고통받는지, 예술가들이 어떻게 창조하는지를 보여주겠다며 의자에 앉아 약 30분 동안 그들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는 두 팔을 벌려 십자가 형태를 만들었다.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전쟁을 춤추겠습니다. 전쟁의 고통과 파괴를, 그로 인한 죽음을. 여러분이 저지하지 않았던 전쟁,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역시 책임이 있는 전쟁을.” 한 관객은 시체 위를 떠다니는 그를 보는 듯했다며, 그의 춤이 죽음에 대항하는 삶의 춤이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니진스키가 세상에 보여준 마지막 춤이었다.

 

니진스키를 추억하며

19세기 러시아의 황실 극장에는 우수한 남성 무용수가 많았다. 니진스키의 스승이었던 레가트 형제도 인정받는 무용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니진스키 이전까지 남자 무용수의 역할은 발레리나를 보조하는 데에 그쳤다. 독무가 있긴 했으나 발레리나에게 휴식을 주기 위한 것으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니진스키는 남성 댄서가 고전 발레에서 주도 역을 차지할 수 있도록 했다. 발레 뤼스에서 니진스키가 거둔 압도적인 성공으로 이후 등장한 <장미의 정령>, <나르시스>, <페트루슈카> 등의 작품에서 남성 무용수는 무대의 중앙을 차지하게 되었다.

니진스키의 삶은 여러 작가에 의해 전기, 회고록 등의 방식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중 최초의 전기는 1933년 니진스키의 아내 로몰라가 출간한 <니진스키>이다. 하지만 니진스키의 일기를 엮은 키릴 피츠라이언은 로몰라의 전기가 구전과 상상에 의존한 결과 사실과 다른 부분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니진스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 무용수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가 안무한 작품들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니진스키의 동생 브로니슬라바는 1981년에 니진스키의 어린 시절 및 그의 예술관을 조명한 <나의 오빠 니진스키>를 출간했다. 브로니슬라바는 디아길레프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 없고 둔한 니진스키의 이미지가 실제 니진스키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디아길레프를 만나기 전에 이미 니진스키의 예술성과 미학적 신조가 형성되었음을 밝혔다.

<발레 뤼스의 탄생>의 저자 피터 리븐은 니진스키가 세계 무용사를 통틀어 어떤 무용가와도 공통점이 없다고 평가했다. 니진스키 못지않게 도약하거나 엘레바시옹, 앙트르샤 등 복잡한 묘기를 시연하는 무용수는 많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니진스키가 창출하는 예술적 효과를 관객에게 미칠 수는 없었다. 무용사가들은 니진스키가 흠 없는 기교, 그리고 특이하면서도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완벽한 예술성을 모두 지녔다는 데에 동의했다.

모두가 인정한 무용수이지만, 안무가로서의 그의 자질은 당시 많은 이의 의구심을 샀다. 디아길레프의 동업자를 비롯한 동시대인들이 니진스키의 안무에 혹평했으며, 리븐은 디아길레프가 니진스키를 안무가로 성장시키고자 한 것은 그의 드문 실수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하지만 발레사가 링컨 커스틴은 1975년 저술한 니진스키 연구서에서 그가 <목신의 오후>와 <봄의 제전>, <틸 오일렌슈피겔> 등의 발레에서 확립한 안무의 새로운 양식은 대담하며, 오히려 니진스키가 안무에서 발휘한 천재성은 무용수로서의 능력을 능가한다고까지 공언했다.

61년의 생 중 니진스키가 실제로 무대에 선 기간은 약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도 그가 발레의 전설로 남기에는 충분했다. 30년 이상을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 그의 개인사는 그가 새로이 연 발레 예술의 지평과 대조된다. 니진스키가 일기장에 남긴 말처럼,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으나 그 사랑에 보답받지는 못했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그가 눈동자를 반짝일 때는 오직 춤에 관해 이야기할 때뿐이었다. 움직임으로 세상과 소통했던 그 자신이 곧 춤이었다. 실수 없는 안무도, 어려운 기교도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무용의 신 앞에서.
 

참고문헌 |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 바츨라프 니진스키, 푸른숲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