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간의 갈등이 경제와 안보영역으로 확산되는 등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우리 국민들 사이에선 일본 정치권의 공격적인 극우 민족주의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반일, 극일 논의가 활발하다. 현재의 위기가 일본의 공격적 경제제재로부터 촉발된 만큼 한국의 대응이 일본의 경제제재의 부정적 효과를 극복하는데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일본산 수입 소재의 국산화는 한일갈등의 장기화에 대비하기 위한 우리의 당면 과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 한국은 극우적 민족주의가 지배하는 일본 정치권에 대한 반대를 넘어서 평화와 인권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고, 일본산 수입품의 국산화를 넘어서 전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중소기업,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을 육성해서 학문의 발전과 인류의 번영에 기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양국의 인식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데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 주도의 냉전질서 하에서 한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와 경제 및 안보협력을 분리한다는 합의 하에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봉합해 왔다. 하지만 냉전 질서가 붕괴되고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일간의 갈등을 억제할 수 있는 구조가 무너져 버렸다. 국제정치의 맥락 속에서 볼 때 한일간의 갈등 국면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적반하장식 과거사 인식과 한국경제에 타격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격적인 경제제재로 인해 우리 국민들은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서 기술 독립을 이루는 것을 생존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을 따라잡고 일본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발상은 장기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좁은 우물에 가두는 일이다. 많은 학자들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이 놀라운 경제성장을 거둔 원인을 세계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개방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구미의 최고 수준의 학자들로부터 배우고 그들과 경쟁하겠다는 진취적인 목표가 있었기에 한국의 과학기술 또한 오늘의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유명한 경구가 있다. 과학자가 좁은 의미의 조국의 국익을 위해서 복무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과학자가 인류의 보편적인 지적 성취에 기여할 경우 과학자 개인 뿐만 아니라 과학자의 모국 또한 그 영예를 함께 누릴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어려움에 처한 국내 기업들과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발족시킨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문단도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맞대응을 넘어서 세계적 수준의 기술을 발전시킨다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목표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및 쓰나미가 발생하자 우리 국민들은 재난에 빠진 일본인들을 돕기 위해 온정을 모았고, 종군위안부 할머니들도 지진 피해를 애도하며 성금 모금에 나섰다. 진정한 의미의 극일은 일본의 극우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인류애에 기초한 보편적인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인들의 극일도 보편적인 과학적 진리의 추구와 기술개발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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