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를 따라가면, 세상을 바꾼 위대한 혁신을 여럿 마주할 수 있다. 의식의 개혁이나 자연법칙의 발견, 새로운 기술의 개발 등이 불러오는 파장은 역사를 요동치게 만든다. 사람들은 변화의 중심에서 혁신을 주도하는 이가 되기를 바라지만, 대개 소수의 선구자에게만 그 기회가 주어진다. 이 기사에서는 요동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키를 쥐었던 위대한 창조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삶과 생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5세기 피렌체, 예술의 요람

르네상스는 14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문화예술 방면의 대규모 혁신 운동으로, 16세기까지 이어지며 중세시대의 끝을 고했다. 르네상스의 정확한 경계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그 시작은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영주, 교황 등의 강제력에서 벗어나 시민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고대 그리스의 사상을 계승하여 인간 중심의 문화로 돌아가고자 했다.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이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피렌체 주변의 마을 빈치의 공증인 가문에서 사생아로 태어난다.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사생아에게 매우 관대했지만, 공증인과 같은 중산계급의 사생아는 상속, 신뢰성 등의 문제로 인해 인정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레오나르도는 가업으로부터 해방되어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열두 살의 나이에 아버지 피에로의 손에 이끌려 피렌체로 향한다. 15세기의 피렌체는 유럽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창의적인 환경을 그에게 제공한다. 피렌체에는 부유한 상인 계층을 중심으로 예술 분야의 대규모 후원이 이뤄지고 있었고, 이탈리아 도시국가 특유의 분위기와 공화정이라는 체제가 맞물려 예술과 상업이 유례없이 강성했다. 오락거리가 넘쳐나는 도시 속에서 일어난 활발한 아이디어의 교류는 레오나르도의 세계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피렌체에 도착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레오나르도는 예술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밑에서 도제 교육을 받게 된다. 조르조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베로키오는 어린 레오나르도의 재능에 놀랐고, 피에로와의 인맥 때문이 아닌 레오나르도의 실력 때문에 제자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한다. 일찍이 레오나르도는 다른 중산층 자제들처럼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대신 주산 학교를 다녔고, 베로키오의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20대 초반까지 일한다.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나온 후에는 피렌체와 밀라노를 오가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그는 베로키오의 화풍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도와 기법을 시도한다. 재미있는 것은, 주의력이 산만하고 게으른 그의 성격 때문에 끝까지 완성되어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엄청난 수의 미완성 작품들과 스케치, 작업 노트 속 빼곡한 구상들은 안타깝게도 세상에 등장하지 못했다.

 

저는 물론 그림도 그릴 줄 압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대중에게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을 그린 위대한 화가로 여겨지지만, 레오나르도 자신이 수많은 작업 중 미술에 특별한 가치를 두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피렌체에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레오나르도가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보낸 구인 편지에서도 미술과 조각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자신이 스포르차 가문에 필요한 기술자임을 피력하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지만, 그가 단순히 그림에만 몰두했던 인물이 아님은 확실히 드러난다.

레오나르도의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제쳐두고, 그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분야의 교수를 목적으로 밀라노로 향한다. 레오나르도는 1482년부터 1499년까지 밀라노에 머물며 다방면에 걸친 활발한 창작활동을 이어간다. <암굴의 성모>, <최후의 만찬>과 같은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그려졌으며, 베로키오의 작업실에서 개발한 스푸마토 기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실패와 습작, 미완성 작품들을 남기며 평면 속에 완벽한 입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후의 만찬>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그려진 벽화로, 예수가 사도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한 직후의 상황을 담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유기적인 변화과정처럼 보이기를 원했고, 마치 연극 공연을 조율하듯 인물들의 동요를 완벽하게 담아냈다. 또한, 복잡한 소실점에 대한 연구와 사람들이 그림을 바라보는 각도에 대한 고찰이 더해져 자연스러운 원근감을 연출해냈다. 하지만 프레스코 벽화에 맞지 않는 기법과 느긋한 작업 속도로 인해 <최후의 만찬>은 빠르게 손상되었다. 현재는 여러 차례의 복구 과정을 거쳤지만, 레오나르도의 흔적이 적지 않게 사라진 상태이다.

레오나르도의 가장 유명한 작품 <모나리자>는 1503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그가 프랑스로 이주한 후에야 완성되었다. 1517년까지 계속해서 붓질을 해왔던 것으로 추정되는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사망한 후 작업실에서 발견된 사실상의 유작이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인물의 평생에 걸친 연구의 정수라고 여겨진다. 회화 기법으로는 스푸마토 표현의 결정체이며, 그가 광학과 해부학에 바친 시간이 빛 표현과 구도에 녹아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소가 된 <모나리자> 속 여인의 희미한 웃음에는, 인간의 본질과 감정에 대해 평생을 고찰해왔던 레오나르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세상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다

앞서 언급한 레오나르도의 구인 편지는 그가 구상한 수많은 무기와 군사 기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레오나르도는 공성 장비, 방어 장치, 포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뽐냈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실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의 군사 공학적 지식을 높게 평가하지 않은 듯하다. 더불어,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도시 계획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힌다. 그는 자신이 구상한 유토피아적 도시의 구조를 직접 설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공상에 그쳤으며, 노트 구석의 실현되지 못한 메모로만 남았다.

레오나르도의 기상천외한 공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비행과 관련된 기계일 것이다. 그는 새들의 움직임과 비행의 원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기계장치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에는 새의 근육과 날개의 구조, 세세한 움직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더불어, 움직임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기계학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한 흔적이 있다. 결국 그는 오랜 관찰과 실험을 통해 비행 기계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흥미로운 점은, 레오나르도가 비행에 이토록 집착한 이유가 하늘을 나는 꿈과 같은 것이 아닌 단순히 더 완벽한 무대 연출을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레오나르도는 자연 현상에 대한 관찰을 서술하는데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수학을 통해 원근법을 이해한 이후, 수학의 언어를 사용해 자연으로부터 아름다움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기하학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는데, 밀라노에서 만난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와 간단한 수수께끼를 주고받는 데에서 초기 위상기하학에 대한 탐구까지 넓은 분야를 탐구했다. 레오나르도는 수학을 통해 이해한 광학 법칙과 원근법, 황금비율 등을 그의 작품 전반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더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인체의 표현을 위해서는 인체의 구조와 움직임에 대해 더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 또한 인체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부학을 선택한다. 더 자연스러운 인체 표현을 위해 근육과 뼈의 생김새를 기록했으며, 광학적 탐구를 위해서 안구를 해부하기도 했다. 감정의 표출과 관련된 많은 연구에서는 얼굴 근육과 신경을 자세히 해부하여 기록했다. 레오나르도의 관찰 결과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기에도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순환계의 중심이 간이 아닌 심장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레오나르도의 탐구는 대부분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지만, 회화를 포함한 다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상상으로 가득한 연습 노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는 수많은 그림과 빽빽한 글, 거울 문자로 쓰인 암호로 가득하다. 그는 모든 궁금증과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빛을 보지 못한 공상들과 끝맺지 않은 고찰들이 수없이 잠들어 있다. ‘딱따구리의 혀를 묘사하라’와 같이 전혀 뜬금없는 주제를 자신에게 던지기도 한다. 후세의 많은 학자는 이 헛소리가 태반인 노트가 레오나르도의 창의성의 근원일 것이라고 말한다. 노트 속에서 우리는 찰나의 호기심도 놓치지 않고, 매번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려는 레오나르도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지독한 게으름뱅이였다. 작업의 기한을 넘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완성한 작품보다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 훨씬 많다. 이는 단순히 레오나르도가 산만한 성격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진리를 향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는 완벽주의자였다.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가진 지식이 다르다면, 어제의 내가 그린 작품은 오늘의 내가 알게 된 사실들을 담고 있지 않다. 레오나르도가 몇몇 작품들을 완성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미룬 것은, 끝없이 변화하고 깊어지는 그의 세계를 작품 속에 그려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0년을 더 살았다면 <모나리자>에는 수없이 많은 붓질이 더해졌을 것이다. 어김없이 레오나르도의 작업실에서 발견되었을 <모나리자>는 지금의 모습보다 더 완벽한 세계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는 하늘이 준 재능만을 내세운 오만한 천재가 아닌, 미지를 향해 영원히 질문하는 괴짜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끝없는 탐구 정신과 위대한 창의성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흐른 지금도 시대를 이끄는 이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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